◎신용부족 중기·서민에는 때로 ‘필요악’/24조원은 금융권 유입 산업자금 활용/나머지 7조원 개인은닉자금이 문제경제구조나 소득수준에 관계없이 어느 나라에건 지하자금은 존재한다. 흔히 세무당국에 신고되지 않은 개인이나 기업 소득의 총액을 지하자금, 그 유통경로를 지하시장이라고 한다.
지하자금의 속성은 나라마다 차이는 있지만 우리의 경우 대개 사채, 무자료 거래, 밀수 등의 지하경제 활동에서 파생한 돈이다. 제도권에서 벗어나 거래되는 특성상 지하자금의 규모는 정확히 산출하기 어렵다. 여러가지 추산방식에 따라 편차도 큰데 총통화에서 현금통화가 차지하는 비율의 변화추이를 살펴 보는 「탄지(TANZI)」 방법이 가장 흔히 쓰인다.
한국조세연구원이 탄지방법에 따라 산출한 우리나라의 지하경제 규모는 국민총생산(GNP) 대비 72년 16.6%에서 78년 14.8%, 84년 11.1%, 90년 9.7%로 감소해오다 93년 8.7%에서 94년 8.8%, 95년 8.9%로 증가세로 돌아섰다.
최근 강경식 경제부총리가 지하자금의 규모를 GNP의 10%선이라고 말한 것처럼 금융실명제 실시에도 불구하고 지하경제 규모는 커지고 있는 추세이다.
절대금액으로는 72년 6,961억원에서 82년 6조5,576억원, 92년 21조4,834억원 등 고도성장에 따라 엄청난 증가율을 보였다. 94년에는 26조6,523억원에 이르렀고 현재는 31조원을 웃돌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이런 천문학적 액수의 지하자금은 모두 어디에 있는 것일까. 관계당국의 추정에 따르면 이중 20조여원은 합의차명 형태로 금융권에 들어와 있고 4조원가량은 비실명 가명계좌에 묶여 있다. 이 24조원은 이미 산업자금으로 쓰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나머지 7조원 정도가 이른바 「개인 은닉자금」이다.
물밑에 잠겨있는 이 7조원 가량의 돈은 『쓰고 보자』는 식으로 과소비를 조장할 수도 있고 아예 현금으로 장기간 묶여있을 가능성이 크다.
최근 고개를 들고있는 지하자금 양성화 주장은 차명 자금이 제도권 밖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막고, 또 잠자고 있는 돈을 산업자금으로 활용하자는 취지이지만 전체 지하자금 가운데 대상자금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지하자금은 기업이 무자료 거래나 거래금액 조작 등으로 조성한 비자금이나 얼굴없는 「큰손」들이 주무르는 사채, 금융과세를 피하거나 출처를 숨기기 위한 부유층의 돈 등으로 이뤄져 있다. 또 흔히 「개미군단」이라 부르는 중산층의 주머니 돈도 상당한 몫을 차지한다. 영세 자영업자가 매출액과 소득을 줄여 신고해 마련한 돈과 소규모의 개인 채권도 크게는 지하자금에 들어 가기 때문이다.
지하자금은 노출을 꺼리는 어두운 돈으로 경제 질서를 어지럽히는 주범으로 인식되고 있다. 특히 사채는 이자 소득의 탈세와 고금리에 따른 이용자 피해를 낳고 있다. 반면 담보나 신용 부족으로 금융권의 대출 대상에서 빠져있는 중소기업이나 서민에게 필요한 자금을 제때에 공급하는 순기능도 무시할 수는 없다.
전문가들은 『지하자금은 정상적인 경제활동에서 자연적으로 파생한 부산물로 그 연결고리를 차단하기 어렵고 완전히 차단해서도 안되는 필요악』이라며 『지하시장이 없어지거나 모두가 제도권으로 들어온다면 우리의 경제구조상 당장 중소기업의 30∼40%가 도산위기를 맞을지도 모른다』고 지적했다.<염영남 기자>염영남>
◎선진국에도 지하경제가 존재/미 10%내외 이 최고 30%선/일본은 ‘대금업법’ 운용/대만선 계 비슷 ‘회’ 성행
사회체제나 경제발전 수준에 따라 비중은 다르지만 세계 어느 나라에도 예외없이 존재하는 지하경제.
재경원과 한국개발연구원(KDI)이 분석한 선진국의 국민총생산(GNP) 대비 지하경제비율은 미국 8.4∼12.9%, 일본 11.3∼12.2%, 대만 20.9∼24.9%, 이탈리아 10∼33%로 우리나라보다 오히려 높게 나타났다. 이미 실명제가 성공적으로 정착한 나라들이지만 그만큼 지하경제도 깊고 단단한 뿌리를 내리고 있고 나라마다 그 성격도 다르다.
사금융이 거의 없는 미국에서는 흔히 마약 도박 밀수 매춘 절도 사기 등 범죄관련 자금의 흐름을 지하경제로 본다. 특히 마약거래에 따르는 돈세탁과 탈세는 악명이 높다. 최근들어 다국적 기업의 팽창과 높은 무역장벽 때문에 멕시코나 캐나다를 경유하는 밀수가 지하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커졌다.
일본의 지하경제는 유형과 비율이 우리와 비슷하지만 사채시장의 제도화를 이뤄 지하경제에서도 조세 정의를 어느 정도 실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와 다르다. 자금의 전반적인 공급초과에도 불구하고 은행 등 전통적인 금융기관이 충족시킬 수 없는 서민 금융수요가 「대금업법」에 의해 합법적으로 운영되는 금융회사에 몰리고 있다. 일본의 대금업법은 이용자를 고리채로부터 보호하는 한편 대금업자에게 안정적인 영업기반을 제공, 지하경제의 큰 부분을 제도화하는데 성공한 사례로 꼽힌다.
지하시장의 비중이 높은 대만은 경제개발을 촉진하기 위해 제도금융권이 저금리 체제를 유지함에 따라 고금리, 고수익을 겨냥한 사채업자 등이 난립하고 있다. 은행여신이 대기업이나 국영기업에 편중돼 중소기업은 부족자금을 사금융에서 조달하고 있으며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우리의 「계」와 비슷한 「회」가 성행하고 있다.
국민 85%가 회를 이용할 만큼 비중이 크고 그 규모도 국민총생산(GNP)의 6.8%에 이른다. 대만은 89년 은행법을 개정하는 등 제도권 금융개혁을 거듭해 왔지만 사금융에 대해서는 경제질서에 미치는 악영향이 별로 크지 않은데다 순기능도 있어 이를 막기위한 별도의 입법조치는 하지 않고 있다.
이밖에 이탈리아 스페인 등 실업율이 높은 유럽국가에서는 일반적인 지하경제 유형보다 세무당국이 소득을 포착하기 어려운 뜨내기 직업을 갖거나 직업을 갖고서도 부업에 종사하는 「암노동시장」의 존재가 지하경제의 큰 몫을 차지한다.<염영남 기자>염영남>
◎실명제 완화 필요한가/‘일부정치인·돈가진 자의 주장’/밖으로 나올 돈은 이미 다 나와/숨은 돈은 양성화해도 ‘꽁꽁’
지하자금을 산업자금으로 활용한다는 명분으로 금융실명제 보완 주장이 나오고 있다.
자금출처 조사가 면제되는 저리의 장기채권을 매입토록 하거나 대금업을 허용, 사채업을 양성화하고 투입자금에 대해서는 출처를 묻지 않도록 하는 것 등이 지하자금 양성화 방안으로 거론되고 있다. 한마디로 금융실명제의 완화가 골자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에는 몇가지 허점이 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우선 산업자금으로 활용할 돈이 어떤 돈인지가 분명하지 않다는 것. 제도권 금융기관에 이미 들어와 있는 가명 또는 합의차명 예금이나 무기명 채권에 투자된 돈은 금융실명제의 틀에서 벗어나 있는 돈이지만 이미 산업자금으로 활용되고 있는 상태이다. 또 사채시장에 돌아다니는 돈도 어음할인 등을 통해 경제활동에 이용되고 있어 결국 안방 장롱이나 금고 속에 잠자고 있는 돈만 끌어 내면 된다. 따라서 지하자금 양성화를 논의하려면 사장된 현금의 규모와 이 돈의 양성화 가능성을 먼저 검토해야 한다는 것이다.
국세청 관계자는 『93년 9월 자금출처 조사를 면제해 주는 산업은행의 장기저리 채권발행 등 2차 금융실명제 보완시책에 따라 밖으로 나올 돈은 다 나왔다』며 『현재 어떤 형태로든 금융권에 유입되지 않은 지하자금은 밀수 마약 뇌물자금 등으로 아무리 양성화조치를 해도 양지로 나오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그는 오히려 보완이 필요하다면 실명제를 강화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부동산 실명제와 98년 10월 실시 예정인 주식 실명제의 성공여부는 금융실명제에 달려 있습니다. 얼마든지 검은 돈이 빠져 나갈 구멍이 있는 현행 금융실명제를 지하자금의 산업자금화를 명분으로 또다시 완화한다면 실명제는 이름만 남게 됩니다. 금융실명제는 일반 서민에게는 다소 불편한 절차에 불과하지만 정치자금 등 검은 돈을 쥐고 있는 사람들로서는 자금운용의 걸림돌이에요. 그런 점에서 현재의 금융실명제의 보완론은 일부 정치인과 돈있는 사람들의 주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재경원 관계자도 『대부분의 음성자금은 합의차명 예금이나 무기명 채권형태로 금융실명제의 화살을 피하고 있다』면서 『실제로 장롱속에 숨어있는 돈은 그리 큰 규모가 아니다』고 지적했다.<이진동 기자>이진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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