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만화·성 등 관심대상 다양화만큼 ‘백가쟁명’의 문화담론들/그 다양함 만큼 깊이를 꿰뚫는 이론은 과연 있는가90년대식 유머의 전형이라는 「만득이 시리즈」. 90년대의 상황을 이 시리즈에 빗대어 말한다면 만득이가 가는 곳 어디에나 나타나 그를 괴롭히는 귀신을 「문화」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상황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점에서 보면 더욱 그러하다.
90년대 문화에 대한 관심과 열기는 더 분명히 말하면 대중문화에 대한 관심이라고 말할 수 있다. 대중문화에 대한 관심은 문화이론에서 일상영역이 중요한 연구대상으로 인식된 이론적 흐름과도 연결된다. 한 문화연구자는 『80년대를 지배했던 거대이론은 변화한 90년대의 상황을 설명하는데 더이상 유효하지 않게 되었다. 점점 복잡해져가는 사회와 자신의 삶, 일상을 설명할 수 있는 유연한 이론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대중문화에 대한 관심과 함께 지금까지 주목을 받지 못했던 「육체」, 「공간」, 「성」같은 주제들이 「문제적인 영역」으로 인식되게 되었다. 대중문화도 영화, 대중음악, 만화, 광고 등 영역별로 세분화해 전문적인 연구가 늘고 있다. 대학에는 대중문화를 전공한 박사들이 이미 배출되었다. 대중문화 연구가 학문의 한 분야로서 엄연하게 자리잡아가고 있는 것이다.
문화이론에 대한 이론적 접근이 문화연구자 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에게까지 확대된 것도 특징적인 현상이다. 민족예술인 총연합에서 92년부터 운영중인 「문예 아카데미」강좌에는 수강생들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문화이론과 영화 강좌가 특히 인기가 높은데 수강생들은 대부분 20, 30대의 직장인들이다. 문예아카데미 관계자는 『문화에 대한 대중적인 관심이 자신이 즐기는 문화를 어떻게 바라볼지 탐구하는 것으로 이어진 것은 긍정적인 현상』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문화에 대한 관심이 긍정적인 측면만 가지는 것은 아니다. 한나래 출판사 편집장 이리라씨는 『우리의 문화 이론이 부재하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점이다. 외국의 문화이론을 끌어다 쓰는 것은 문화연구에서도 마찬가지』라고 지적했다.
「문화담론의 과잉」을 지적하는 사람들도 있다. 문화관련 서적과 잡지를 통해 많은 문화이론이 소개되었지만 정작 이 이론들이 변화하는 일상을 얼마나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느냐는 비판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문화담론의 과잉」이라는 표현도 그리 적절치는 않다. 90년대의 문화현실을 설명할 수 있는 생산적인 담론은 부재하지 않느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다.
90년대 초반 문화연구의 거품이 사그라들고 있는 이즈음 대중문화 뿐만 아니라 문화의 다양한 영역에 대한 진지한 재검토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제기되고 있다. 최근 대형출판사들이 창간하거나 준비중인 문화관련 잡지 등에서 감지되는 차분한 목소리는 문화연구의 새로운 흐름이다.<김미경 기자>김미경>
◎바야흐로 문화의 르네상스시대?/각종 비평·담론 리얼리즘적 이념틀 벗고 음악·영화·스포츠 등 ‘다양한 물줄기’
「리얼리즘론에서 문화론으로」. 문화 비평·담론의 르네상스는 80년대 말에서 90년대 초·중반 「격변기」를 거치면서 시작되었다. 사회주의 체제의 몰락, 문민정부 출범, 대중소비사회의 본격 부상 등은 지식인들로 하여금 문학 중심의 리얼리즘론의 협소함을 타개할 대안적 이론틀을 찾아나서게 했다. 그리고 백가쟁명을 방불케 하는 다양한 논의는 이내 문화론이라는 큰 줄기로 모아졌다.
문화비평 1세대들에 의해 주도된 문화논의는 서구 비판이론의 전통, 프랑스 「신철학」 등의 새로운 흐름을 폭넓게 수용하면서도 마르크스주의라는 큰 틀은 계속 유지했다. 사실상 국내 최초의 본격 문화잡지인 계간 「문화과학」 동인들이 그 주역들. 강내희, 심광현, 이득재, 임상훈, 이동연 등 인문사회과학 분야 소장 학자들이 중심이 된 「문화과학」 동인들은 육체, 욕망, 공간, 사이버스페이스 등 다양한 분야에 대한 논문과 실제 비평을 내놓으면서 현재 문화논의 지형에서 가장 비판적인 그룹을 형성하고 있다.
문예지로 전환하기 이전의 「상상」과 「상상」의 창간 편집위원들이 주축이 된 「리뷰」는 「문화과학」에 비해 상대적으로 유연한 입장을 보이면서 문화논의의 또다른 스펙트럼을 형성했던 그룹이다. 이들은 창간 때부터 줄곧 대중음악, 영화, 스포츠 등 실제 비평에 강한 면모를 보여왔다. 강헌, 이종숭, 서영채, 정윤수 등이 이 그룹에 속했다.
문화논의·비평이 더욱 활발해지면서 좀더 세분화한 영역별 논의가 생겨났다. 이와 더불어 기존 계간지 중심구도가 허물어지고 월간지, 부정기 간행물, 단행본 등 다양한 움직임이 전개되었다. 도발적인 내용과 파격적인 편집의 문화연구 서적의 잇단 출간으로 주목받은 「현실문화연구」의 김진송, 엄혁, 김수기 등의 미술비평가 출신 그룹, 국내 페미니즘 논의의 대중화에 크게 영향을 끼친 조혜정 등의 「또하나의 문화」 그룹, 정성일이 이끄는 영상 전문 월간지 「키노」 등. 종합 대중문화교양지를 표방하며 여성지 아성에 도전했던 「이매진」과 「문화게릴라」를 자처하는 70년대 출생 젊은층이 중심인 「오늘예감」 그룹은 이제 「공통교양과목」이 되어버린 문화비평·담론의 위세를 엿보게 한다.<황동일 기자>황동일>
◎대중문화 연구·비평 잡지창간 붐
신세대론-페미니즘론-섹슈얼리티 문제 등을 둘러싼 치열한 공방 이후 한동안 조용했던 문화판에 새로운 움직임이 일고 있다. 리얼리즘론의 한계 극복이라는 「제1의 물결」, 문화담론의 대중화로 특징지어지는 「제2의 물결」에 이어 한동안 잠복기를 거쳐 최근 문학·문화 관련 잡지들의 창간 붐과 함께 새로운 「제3의 물결」이 밀려들고 있다.
문학과지성사에서 발간하는 문화무크지 「이다」, 민음사의 「현대사상」, 내달 창간 예정인 「부커진(bookazine)」(문학사상사), 동문선에서 5월중 발간 예정인 「세계사상」(가제) 김영사의 「새로운」 등이 대표적.
이미 창간됐거나 창간 준비중에 있는 이들 잡지들은 기존 문화논의의 성과를 폭넓게 수용하면서도 나름의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는 공통점을 보인다. 이러한 비판적 수용의 태도는 다시 「인문학과 사회과학의 주요 쟁점에 대한 꼼꼼히 읽기, 다시 읽기를 통한 21세기 문화의 새로운 모델 제시」(「현대사상」)라는 보다 유연한 아카데미즘에서 「인접 과학과의 적극적인 소통 시도를 통한 문학의 경계 확장 모색」(「새로운」)에 이르기까지 미묘한 차이를 드러낸다. 문화담론의 거품경제가 얼마만큼 걷힌 상황에서 출사표를 던진 이들 3세대 잡지들이 또한번의 요란한 「유행」에 그칠 지, 아니면 문화논의의 질적 심화에 기여할 지는 좀더 두고봐야 할 것 같다.<황동일 기자>황동일>
◎전문가 진단/정윤수 문화비평가/환멸의 시대 90년대 비평가는 정보전달자에 불과할 뿐이다
담론은 언제나 현실의 뒤를 쫓아간다. 현실은 럭비공처럼 사방으로 튀어가고 담론은 그 뒤를 숨가쁘게 뒤쫓는다. 담론생산자들은 때로 미망에 사로잡힌다. 자기가 쫓고 있는 것이 현실인지, 아니면 현란한 이미지들의 축포에 눈이 멀어 늪으로 기어가고 있는 것인지 분간이 가질 않는다.
문화비평가들의 곤혹스러움은 턱없이 무디어진 현실감각에서 온다. 자신의 문화적 발언이 과연 이 축축한 늪을 건너는 데 얼마나 효과적인가, 요컨대 글쓰기의 정체성이 자기 내부에서 위협받고 있는 것이다. 문화 그 자체의 내부회로에 골몰하다 보면 어느 순간 탈정치화를 선도하는 선동가가 아닌가 하는 죄책감(?)이 스멀스멀 기어나오고, 그 바람에 록은 저항의 음악이니 어쩌니 하는 글을 써놓고 보니 이 교과서적 범주를 벗어나는 범례가 너무 많아 더 이상의 논구가 중단되고 만다.
현실은 가파른 속도로 질주하는데 자신은 현실판단의 준거조차 없는 꼴이다. 아니 더큰 문제는 현실과 담론이 벌이고 있는 추발경기의 팽팽한 긴장에 대해 너무나 안이하고 무반성적인 태도로 임하는 글쓰기다. 냉철한 판단과 섬세한 분석 대신 상투적인, 너무나 상투적인 반항의 제스처만 곳곳에서 튀어나오고 자기 자신조차 설득하지 못하는 투정과 심술과 비어가 문법적 고려조차 없이 쏟아지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그러다 보니 이 좁은 마당에 벌써 소리소문없이 분파가 나뉘어지고 서둘러 안전한 곳으로 이주하는 이도 늘고 있다. 이 환멸의 시대를 살아남기 위한 전략적 실천으로서의 글쓰기는 오로지 문장 속에서나 가능한 이야기가 되고 있다.
제 무덤을 파는 심정으로 아주 독하게 말하자면, 오늘의 문화비평가는 어쩔 수 없이 딜레탕트(예술호사가)들이다. 첨단의 이미지로 구축된 카페가 새로운 진지가 되고 있다. 헤네시를 홀짝이며 고통을 이야기하지 말라는 법은 없지만, 그래도 우리는 너무 갈 데까지 간 것은 아닐까. 누구나 견인주의를 제 삶의 원칙으로 채택할 필요는 없지만, 따라서 이 화려한 시대에 진정으로 소외된 자의 내성을 찾아내는 3류의 미학에 모두가 집착할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우리는 너무 저급한 엘리트가 돼가고 있다. 비평가가 아니라 정보전달자이며, 담론이 아니라 취미와 유행의 부흥사로 현실을 겉돌고 있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90년대라는 추악한 현실이 빚어놓은 축축한 늪이라면 묵묵히 수긍할 도리밖에 없다. 하지만 이제는 잊혀진 어느 혁명가의 말을 비틀어 보건대, 늪으로 들어가지 않을 자유에 대해, 안락함과 안전함에 길들여지지 않을 권리에 대해, 위험하게 사는 삶의 진정성에 대해, 이제는 카페 바깥으로 뛰쳐나와 한번쯤 심사숙고할 때가 되었다. 사실 너무 늦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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