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학을 하면 자칫 마를 만나기 쉬우므로 고비고비마다 스승을 구하거나 선배들의 수련경험이 적혀있는 책들을 참고해야 한다』 늦깎이로 검도에 입문한 어느 소설가의 체험담 한 토막이다. 『그는 구름을 굽어보는 산정에 홀로 서 있는데 아무리 둘러보아도 그리로 올라가는 길이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사숙했던 어느 철학자의 전기를 쓰면서 후학이 남긴 고백이다.눈 위에 발자국을 남기지 않고 다닌다는 고수들의 이야기는 무협지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선생이 간 길은 눈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그 길은 눈으로 볼 수 있는 지도 위에 그려놓지 못한다. 바로 여기에서 지도나 책을 넘어서는 선생의 깊이를 본다. 지도는 다만 보이는 길을 모아둔 것이고, 책이란 정답에 이르는 길을 밝혀둔 것에 지나지 않지만 선생은 「길없는 길」을 몸으로 체달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길없는 길」은 길이 없기에 진리도 아니다. 그러나 길은 길이기에 무리도 아니다. 내가 쓰는 말로 하자면 그것은 바로 「일리」인 것이다. 가령, 눈송이나 물보라의 길을 하나만으로 정할 수 있는가? 그러나 모두가 땅과 바다로 떨어지는 점에서는 하나다.
「영어의 왕도」나 「수학의 정석」같이 길과 방법이 분명한 분야에서만 놀고자 한다면 애써 「선생」이니 「길없는 길」따위를 토론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사람살이란 유심현묘한 법, 사방으로 뻗어나간 성숙의 과정에는 「길없는 길」이 무수하다.
이 길없는 길을 갈 수 있는 방법은 우선 기계적인 방법을 믿지않는 것이다. 차가운 방법에 기대지 않고 따스한 선생의 손을 잡는 것이다.
체달의 긴 역정을 통해서 스스로 「길없는 길」을 느끼고, 일리의 감각을 키울 수 있을 때까지 주름진 선생의 손에 의지하는 길이다. 그것도 처음에는 선생 쪽에서 손을 내밀어 잡아주는 방식 밖에 없다. 대체로 신참의 눈에는 선생의 손마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선생이 없는 시대에 학생의 꼴을 하고 있었던 나는 학생이 없는 시대에 선생의 꼴을 하고 있으면서 오늘도 『길없는 길없는… 길』의 숲을 배회한다.
아, 아무리 눈을 부릅뜨고 사위를 살펴도 선생이 간 길은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길없는 길이며, 내가 스스로 만들어가야 할 길이기 때문이다.<철학>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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