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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고 보자’/과소비 열풍 흔들리는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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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고 보자’/과소비 열풍 흔들리는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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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03.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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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 다 사는데 나만 안사면 큰 일이라는듯/GDP성장률을 추월한 가계소비 증가율/500만원짜리 소파와 3,000만원 카펫이 팔리고/외제범람·초등생 해외연수도 일부 부유층만의 전유물은 아니다/경기침체에도 아랑곳없이 농촌으로까지 번지는 ‘과소비 공화국’의 일그러진 풍속도『누구네 집에서 새로 나온 오븐레인지를 샀는데 괜찮다더라는 이야기가 나오면 당장 오븐레인지 구입붐이 일어요. 남들 사는데 나만 안사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야단법석이지요』

경기 의정부시의 한 아파트단지에 사는 주부 K(39)씨는 올들어 500여만원을 들여 소파와 전자레인지, 냉장고, 세탁기를 새 모델로 바꿨다. 이 아파트로 이사올 때 몽땅 버리고 새로 장만한 지 겨우 3년만이었다. 『쓰는데 무슨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싫증이 나던 차에 마침 이웃집 주부들이 바꿔 보라고 한마디씩 해서』 쇼핑센터에 같이 가 물건을 골랐다.

『남편이 출근하고 아이들이 학교에 가고나면 주부들이 달리 뭐 할 일이 있나요. 모여서 수다를 떠는데 주로 물건사는 얘기이고 어떤 물건이 화제가 되면 「일단 한번 보자」며 백화점이나 쇼핑센터로 몰려 가요. 견물생심이라고 계획에 없던 구매를 하게 되고 가장 많이 사는 게 유행이 자주 바뀌는 옷이에요. 주부들에게 쇼핑은 권태와 스트레스를 더는 방편이거든요』

K씨는 초등학교에 불고 있는 어학연수 열풍 때문에도 한동안 마음고생이 심했다. 학습지 회사 등이 방학동안 희망자를 모집해 미국 캐나다 호주 등지로 영어 어학연수를 보낸다. 미국의 경우 연수비만 250여만원이고 용돈까지 합치면 300만원이 넘게 들지만 K씨는 올 여름방학에는 이돈을 「투자」하기로 결심했다. 초등학생인 딸아이가 친구들이 해외연수를 갔다왔다며 풀죽어 있어 안쓰러웠다. 『2년전만 해도 서울 강남의 부유층 자녀들이나 가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때는 쓸데없는 외화낭비라고 저도 욕을 했어요. 그러나 수도권 위성도시의 아파트단지에까지 해외연수 바람이 불고 있으니 따라가지 않을 수가 없어요. 돈이 딸리면 겉옷은 유명메이커 제품으로 사주고 속옷은 재래시장에서 산 싸구려를 입히면서까지 아이들 기를 살려주는 게 요즘 세태예요』

중견건설업체 부장인 남편의 월급은 보너스를 제외하고 약 200만원. 중학교와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들과 딸의 교육비 등이 만만하지 않아 살림에 여유가 있을 수 없다. 『문득 내가 분에 넘치게 돈을 쓰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어요. 하지만 남들에게 지기싫어 「어떻게 되겠지…」하고 일단 저질러놓고 보는 경우가 많아요. 한달에 한 300만원은 쓰는 것 같아요』

K씨는 신용카드가 자신의 소비를 부추긴다고 털어 놓았다. 당장 현금을 내지 않아도 돼 돈이 나간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뿐더러 『다음달 월급으로 메우면 된다』는 생각때문에 씀씀이가 자꾸 커진다는 것. 그는 10년전 신용카드를 사용하면서부터 가계부를 쓰지 않고 있다. 『지난달 남편앞으로 150만원이 넘는 카드대금 청구서가 날아왔어요. 남편에게 캐 물었더니 직원들에게 술을 사는데 썼다고 해서 크게 한판 했어요. 경제가 어렵다지만 「남들도 원만한 조직생활을 위해 그렇게 쓴다」는 남편의 말을 들어 보면 꼭 그렇지도 않은 것 같아요』

과소비는 도시의 아파트단지에 국한된 현상이 아니다. 강원도의 한 군소재지에서 직장생활을 하는 Y(32)씨는 『믿기지 않겠지만 들녘에 나가면 한손에 농기구, 한손에 핸드폰을 들고있는 농부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고 농촌풍경을 전했다. 『저를 비롯해 고향에 남은 젊은이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승용차부터 삽니다. 그것도 2,000㏄이상 대형차가 주종이지요. 물론 신용카드는 기본입니다. 또 이웃집에서 새 가구를 들여 놓으면 똑같은 가구를 사 들이느라 온동네가 난립니다. 농촌에 팽배한 절망감이 그런 엉뚱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

수입품만을 모아놓은 서울 강남 G백화점 명품관. 여느 백화점 같으면 쇼핑객들로 북적거릴 시간인 하오인데도 매장마다 그저 2∼5명의 손님들이 물건을 살피는 한산한 분위기였다. 값이 워낙 비싸다 보니 「눈요기 쇼핑객」은 거의 없고 실수요자들만 찾아오기 때문이라는 게 백화점 관계자의 설명이었다.

시스템키친 설치에 2,000만∼3,000만원을 부르는 3층 주방가구매장에서는 혼수 마련차 나온 듯이 보이는 중년 여인과 딸이 물건을 고르고 있었다. 3개월전에 주문을 하면 이탈리아에서 완제품을 들여 와 설치해 준다고 종업원은 자랑삼아 말했다.

수입카펫 매장에는 국산제품의 10배 가격인 130만∼400만원 짜리 카펫이 진열돼 있었다. 이란산이나 페르시아산 실크카펫은 2,000만∼3,000만원이라고 해 『그걸 정말 사가는 사람이 있느냐』고 묻자 종업원은 팔리지 않는 걸 왜 진열하겠느냐고 반문했다. 『경기가 좋지않아 매상이 많이 줄었겠다』고 한마디 건넸더니 『여기는 돈있는 사람들만 오기 때문에 별 영향이 없다』는 대답이었다.

서울 소공동 L백화점. 본격적인 결혼철을 앞두고 있어서인지 가전제품매장은 혼수품 구매자들로 북적거렸다. 대형냉장고는 국산 530ℓ짜리가 89만원인데 비해 미국 제너럴 일렉트릭(GE)사의 708ℓ짜리는 256만원으로 가격차가 컸지만 GE사 제품이 더 인기를 끌고 있었다. 『4월에 결혼하는 딸의 혼수품을 마련하기 위해 왔다』는 한 아주머니는 『한번 시집가는 딸에게 이왕 해줄거면 부담이 되더라도 좋은 걸로 해주어야지 않겠느냐』며 주저하지 않고 GE사 냉장고를 선택했다. 영국산 에코레이드 가구는 1인용 소파 하나에 250만원, 3인용 소파는 560만원선으로 국산 고급품의 3, 4배 가격이었다. 그래도 이달들어 주문이 잇따르고 있다고 백화점 관계자는 밝혔다. 강남 G백화점 가전코너를 맡고있는 L부장은 『냉장고 TV 세탁기 할 것없이 날이 갈수록 큰 것만 찾는 추세』라고 전했다.<이진동·이상연 기자>

◎한국이 일본보다 부자?/서울시민 옷값·외식비 도쿄보다 더 지출

정부와 민간연구소가 집계한 각종 경제지표는 우리국민의 과소비가 위험수위에 이르렀음을 잘 보여준다.

재정경제원에 따르면 우리나라 가계소비 증가율은 지난해 2/4분기에 7.0%로 국내총생산(GDP) 성장률 6.5%를 앞질렀다. 이는 90년대 최초의 현상으로 당국은 최근의 과소비 추세로 보아 지난해말까지의 소비증가율과 GDP성장률의 격차는 더욱 벌어졌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특히 걱정스러운 것은 경기 침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비가 늘어나고만 있는 점이다. 그래서 이대로 가다가는 우리경제의 기반이 무너져 회생불능 상태에 빠질 수 있다는 경고마저 나오고 있다.

한편으로 도시가계저축률은 소득의 꾸준한 증가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급격히 떨어지고 있다. 80년대말 이후 완만한 상승세를 보였던 저축률은 95년 29.0%까지 올라 갔다가 지난해 1/4분기에 26.0%로 낮아져 90년대 들어 최저치를 기록했다.

가계지출은 그 목적에 따라 쌀값 전기·수도료 교통비 교육비 등 「필수적 지출」과 외식 오락 여행 전자제품구입 등을 위한 「선택적 지출」로 나눠볼 수 있는데 90년 이래 선택적 지출의 비중이 필수적 지출을 계속 앞지르고 있다. 「꼭 쓰지 않아도 될 돈」을 많이 쓰고 있다는 얘기다. 90∼94년 5년간 가계지출에서 차지한 평균비율은 선택지출 57.7%, 필수지출 42.3%였다.

외상소비인 신용카드 거래가 해마다 급증하면서 95년 연체액이 전년도에 비해 48.3%나 증가했고 지난해 3월의 전년 동기 대비 연체액 증가율이 16.0%에 달한 것도 「벌이에 비해 씀씀이가 지나친」 우리 소비현상의 한 단면이다.

그런가하면 상품소비에서 수입품이 차지하는 비중이 지난해 상반기 사상최고치인 11.3%를 기록했다. 국내생산량 부족이나 국산품의 가격 경쟁력 저하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수요증가에 따라 수입한 상품이 95년 총수입의 절반에 가까운 44.9%에 달했다.

우리의 소비행태를 1인당 국민소득이 3배가 넘는 일본과 비교해 보면 과소비의 심각상이 보다 분명히 드러난다. 지난해 일본의 전체 냉장고 판매량 가운데 400ℓ이상의 대형 냉장고 판매량은 23.4%였으나 우리는 45.6%였다. 95년 서울시민은 월평균 수입이 2.5배인 도쿄(동경)시민보다 외식비 가구구입비 옷값을 더 많이 지출했다.

서울은 가구당 월평균 외식비가 194.5달러인데 비해 도쿄는 191.4달러였다. 가구구입비, 옷값, 이·미용비도 각각 17.1달러, 109달러, 49.8달러로 도쿄의 10.6달러, 102.1달러, 33.7달러보다 많았다. 반면 같은 해 서울시민의 저축률은 29.6%로 도쿄의 35.0%에 크게 미달했다.<유성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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