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품회사가 화장품을 냉장고회사가 냉장고를 자사생산 소비재 제쳐두고 작년 9개월간 21억불 수입/눈앞의 단기이익 좇느라 국내 제조업 기반 ‘흔들’수출에 주력해야 할 기업이 소비재 수입에 앞장서고 있다. 대기업이 자사 생산품과 같은 종류의 외제품을 수입하고 경쟁사 제품을 견제하기 위해 외국산 완제품을 들여오기도 한다. 눈앞의 이익에 급급한 기업의 이같은 행태는 결국 국내 제조업 기반을 무너 뜨리는 자살행위가 될 것이라는 우려가 높다.
관세청이 최근 국민회의 김원길 의원에 제출한 「96년 사치성 소비재 수입현황」에 따르면 대기업들은 기초화장품에서부터 냉장고와 세탁기에 이르기까지 소비재 수입에 열을 올리고 있다.
화장품제조회사인 태평양은 지난해 1,851만달러어치의 화장품을 수입했고 한불화장품과 한국화장품도 각각 557만달러, 470만달러어치를 수입, 판매했다. 에어컨은 아남전자가 전체수입량의 32,9%에 달하는 308만달러어치를 들여왔고 LG전자와 삼성전자 대우캐리어 등에서도 다량 수입했다.
휴대폰은 코오롱정보통신이 6,236만달러, LG정보통신이 5,575만달러어치를 수입했고 전자오븐은 삼성 대우 LG 등 주요 가전회사가 모두 수입을 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비디오카메라도 삼성전자 현대전자산업 삼성중공업 등이 수입업자 대열에 합류했고 자동차는 대우가 305만달러, 현대가 302만달러어치를 수입했다.
삼성과 LG그룹은 각각 SS패션과 LG패션 등 자신의 의류제조업체가 있지만 「런던포그」 「이브생로랑」 「닥스」 등 값비싼 외제의류를 수입하거나 라이선스 계약을 체결, 판매하고 있다.
중견 업체도 예외는 아니다. 아남전자는 지난해부터 일본 마쓰시타(송하)사의 「내셔널」 「파나소닉」 가전제품을 수입하고 있으며 앞으로 소형가전제품쪽으로 품목을 다양화할 계획이다. 주방가구 전문업체인 한샘의 계열사 넥서스는 독일의 「알밀모」와 프랑스의 「모발파」제품 등을 수입해 짭짤한 매출을 기록했다. 유아용품 전문업체인 아가방은 프랑스의 「엘르」를 들여와 함께 팔고 있다. 아가방 관계자는 『아가방과 엘르는 구매계층이 다르기 때문에 특별한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
백화점에서 해외 유명브랜드를 직수입하는 예도 많다. 신세계백화점은 이탈리아제 고급 의류인 「조르지오 아르마니」와 「엠포리오 아르마니」를 판매하다가 반응이 좋자 강남구 청담동과 압구정동에 아예 독립 매장을 설치했다. 롯데백화점도 「아르마니」계열의 고급 의류인 「아르마니 익스체인지」를 들여와 팔고 있다. 외국 업체는 국내유통망을 장악한 국내 대기업 덕분에 아무런 「유통장벽」을 거치지 않고 손쉽게 한국시장에 침투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관세청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1∼9월 30대 그룹의 소비재 수입액은 21억3,900만달러로 전체 소비재 수입액의 17.3%에 이르렀다. 이 기간 30대 그룹의 수출액은 459억2,400만달러에 그친 반면 수입액은 575억7,100만달러를 기록, 전체 무역적자의 77%인 116억4,700만달러의 무역적자를 냈다.
대기업의 소비재수입에 대한 비난이 잇따르자 현대 삼성 대우 등 주요 그룹은 최근 일제히 소비재 수입을 중단하겠다고 선언했지만 「구호」에 그칠 공산이 크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자체 수입은 중단하지만 다른 무역상들이 수입한 소비재는 자사의 직수입품이 아니라는 이유로 계속 판매할 계획이기 때문이다.
개방시대에 수입자체를 무조건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대기업이 제품의 질을 높이고 해외판로를 개척하는 일보다 외제품 수입·판매로 단기차익을 노리는 데 급급할 때 우리 경제의 앞길은 어두울 수 밖에 없다.<조재우 기자>조재우>
◎수입품 왜 사는가/‘국산품 질 낮아도 쓴다’/소비자들 50% 호응불구 국산 제품개발 ‘거북걸음’/홍보부족에 비판 목소리
외제라면 모두가 갖고 싶어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외제품을 사용하는 사람을 거의 매국노처럼 욕하던 시절은 이미 아득한 옛 이야기가 됐다. 저가품과 고가품을 막론하고 나라안에 온통 외제가 가득하기 때문이다. 각종 시민단체나 협회 등은 수입품 불매운동을 꾸준히 벌이고 있지만 이미 백화점에서 재래시장까지 골고루 파고 든 수입품을 막기에는 역부족이다. 또한 세계무역기구(WTO) 체제하에서 시장개방은 움직일 수 없는 추세여서 더 이상 무역장벽으로 국산품을 보호하는 것은 불가능해 졌다.
주부 박혜진(27)씨는 외제품이 질이 좋기도 하지만 값도 싸다고 강조했다. 『옛날처럼 사치와 과시를 위해 외제품을 사는 게 아니에요. 값싸고 질이 좋아서 사는 거지요. 그동안 무역장벽 속에 안주하며 품질개발을 등한시 해 온 기업이 이제와서 애국심 운운하는 건 좀 웃기지 않아요? 가격과 품질에서 수입품을 따라잡지 못하는 국산품이 외면받는 건 당연해요』
안중현(26·Y대 4)씨는 이렇게 말했다. 『학교 주변상가에서도 대부분 수입품을 팔고 있어요. 종류가 다양한 수입품을 피해 선택의 폭이 좁은 국산품을 찾는다는 게 쉽지 않습니다. 수입품의 양적 증가가 국산품 판매를 가로막고 있는 거지요』
한국소비자연구원이 지난해 12월 실시한 국산품 구매의식조사에 따르면 『국산품보다 품질이 좋더라도 외국상품은 사지 않는다』는 문항에 응답자의 50.0%가 『그렇다』고 응답해 전반적으로 국산품을 애용해야 한다는 의식이 강하게 나타났다. 한편으로 『외국상품을 소유한 사람은 품위가 있어 보인다』는 문항에 『그렇다』고 응답한 경우는 7.8%에 불과해 더 이상 수입품이 과시용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보여 주었다.
「소비를 생각하는 시민의 모임」 등 시민단체에서는 이러한 소비자 의식을 감안, 무조건적인 국산품 애용운동에서 벗어나 소비자의 합리적 선택을 돕기위한 품목별 정보제공을 추진하고 있다. 국산과 수입품을 가리지 않고 가격이나 품질에 대한 비교를 통해 보다 값싸고 질 좋은 제품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
과소비추방 범국민 운동본부 박찬성 사무총장은 『수입품은 더이상 낭비의 대상이 아니라 국산품의 질적 개선을 위한 선의의 경쟁자라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고 지적했다.<염영남 기자>염영남>
◎전문가 진단/소비를 생각하는 시민의 모임 김재옥 사무총장/10년 묵은 재고까지 들여오는 무분별한 수입경쟁 문제
「소비를 생각하는 시민의 모임」 김재옥 사무총장은 『소비자들이 국산품을 냉대하게 된 것은 무분별한 업계의 수입경쟁과 정부의 방관 탓』이라고 지적했다. 『시장개방으로 수입품이 밀려드는 것은 당연하고 값싸고 질좋은 물건을 찾는 것도 자연스런 소비행태지요. 다만 시장개방으로 이익을 봐야 할 소비자들에게 오히려 부담이 늘어 나고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는 정부가 수입품 독점가격을 막자는 취지에서 허용한 병행수입의 결과적인 폐해도 문제점으로 지적하면서 보완책을 촉구했다. 국내업체끼리 해외에서 서로 경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원래의 취지는 자취를 감추고 수입가격만 올라간 데다 국내시장이 해외 유명제품의 재고처리장으로 전락했다는 것. 『유명 브랜드의 의류는 10년 묵은 재고를 들여와 팔기도 합니다. 그것도 수입업체가 서로 경쟁을 하는 바람에 값도 턱없이 비싸졌어요』
한편으로 국내 제조업체가 자사 브랜드와 같은 종류의 수입 브랜드 제품을 생산해 판매하면서도 마진이 큰 수입품에 더 비중을 두다 보니 순수 국산브랜드의 경쟁력은 날로 떨어지고 있는 것도 문제점으로 지적됐다. 『한 양말회사는 수입브랜드 제품과 자사 브랜드 제품을 같은 생산라인에서 제조하면서 품질에 차등을 두어 자사 브랜드는 값싼 저질품으로 만들고 있답니다. 국내 브랜드 제품이 시장에서 밀려 나면 결국 우리 경제가 쓰러지는 데도 기업이 눈앞의 이익에 눈이 멀어 제살을 깎아먹고 있는 거지요』
또 정부가 간접적인 무역장벽의 역할을 하기도 하는 수입품의 안전성 검사 등을 소홀히 해 우리나라를 「수입품 왕국」으로 만들었다고 지적했다. 『미국 등 선진국은 세관에서 강도높게 식품의 안전성과 자동차 등의 환경기준 부합여부를 검사합니다. 수입장벽 역할도 하고 국민에게 안전한 제품을 공급하는 효과도 있지요. 그런데 우리 정부는 통상압력 핑계만 대면서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있습니다』
김총장은 결국 소비자와 시민단체가 나서는 것만이 문제의 해결책이라고 강조했다. 『선진국처럼 각 제품에 대해 객관적인 정보를 제공할 기구가 있어야 합니다. 소비자가 해당 품목의 가격과 품질에 대해 정확한 정보를 갖고 구매한다면 엉터리 수입품으로 폭리를 취하는 기업도 사라지게 되고 품질이 좋은 국산품도 제자리를 찾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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