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외경·존엄유지 인류 위한 제1불문율/생물학적 복제 인간 오만/고통과 불행 복제일뿐장엄한 생명의 실상에 대하여 외경과 존엄함을 유지하는 일은 인류에게 남겨진, 그리고 인류를 위한 제일의 불문율이요 최후의 무상복지라 할 수 있다. 생명복제라는 말이 화제가 되고 있다. 시공으로 무한하게 열려있는 장엄한 생명의 실상은 무지와 오만으로 가득한 인간들에 의해 분석과 분해가 가능한 허상으로 전락하고마는 것이다.
미세한 현상이 무진한 현상과 관계하는, 일법이 일체법과 상응하고 이치와 사상이 불이한 무진연기관에 기초해서 말한다면 어느 한 부분의 생물학적 복제를 「생명의 복제」라고 명명하는 것은 옳지않다. 생명복제란 말 그대로 생명의 실상을 본 자만이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볼 수 있고 알 수 있는 세계는 바다의 모래수, 그중 모래알보다 적고 미미한 세간의 일부일 뿐이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속에 갇혀버린 것이 세간이나, 실험의 주체인 인간의식의 투사에 의해 합리적이고 타당한 현실로 보여지는 것일뿐이다.
인간이 말하는 합리와 타당함은 이미 제한된 지식과 무지의 한계가 설정된 세간의 범주에서만 일시적으로 또는 부분적으로 옳다. 비교와 분석이 직관과 통찰에 의해 세속적 차원으로 낮게 평가되는 것은 종교철학 일반에 있어서 마찬가지다. 안목에도 천심이 있으며 세계는 그로 인해 차별하게 열린다. 눈에 천심이 있는 것은 실상이 모든 생명에게 평등하게 열려있다해도 그 수용하는 경계는 차별하다.
생명의 실상은 주객이 둘이 아닌 그 근원에서 열리기 때문에 복제라는 주체와 복제하는 대상이 있는 한,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생명의 복제라 할 수 없다. 그러면 무엇이 복제되고 있는가? 우리의 오만이 참여한 고통의 근원, 세간이 복제되고 있을 따름이다. 세간을 복제하는 일은 업을 복제하는 일이니, 업을 복제하는 일은 고통과 불행을 복제하는 것이다.
세간을 벗어난 안목에 의해 열린 세계를 출세간이라 한다. 출세간도 본질에 있어 범성이 공유하지만 범부가 상응해서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한다. 그래서 참다운 성자는 출세간을 버리고 세간으로 돌아온다. 출출세간이다. 돌아온 성자가 하는 일은 범부들에게 눈을 뜨게 하는 것이다.
눈을 뜬다는 것도 다른 세계를 보여주는 일이요, 더 나아가 다른 세계에 살게 한다는 것이다. 다른 세계를 보기위한 열망은 중생에게 다양하게 나타난다. 과거로부터 이러한 중생의 열망을 성취시키기 위해 신이한 체험과 세계를 보여주는 이적들이 행해진다.
그러나 그러한 신이와 기술을 행함에 있어 반드시 전제되어야 할 숭고한 원칙이 있다. 바로 무상정등정각과 발보리심이다. 다시 말하면 다시 검증될 필요가 없는 완성된 지혜와 일체생명에게 평등하게 이익되는 마음과 결과를 낳게 하여야 한다는 전제다. 그러한 전제가 없으면 사술일 뿐이다.
성인이 세간에 돌아와 중생을 위하는 일에도 이렇게 엄격하고 어려운 조건이 있는데 하물며 중생이 중생을 위하는 일에 있어서 지혜를 빌림이 없다면 고통과 불행의 연속을 가중시키는 중생의 복제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어느 지면을 보니 복제하고 싶은, 위대하다고 생각되는 이러저러한 사람들의 이름이 열거되고 있었다. 물리적 세간 복제로 세상을 바꿔보고 싶은 것이다. 참으로 세상을 바꾸는 일을 인류는 실험실에서 하고 싶은 것일까. 세간을 변화시킬 수 있는 길이 없어서 인류가 지금까지 전쟁과 평화를 공유해온 것은 아니다. 복제된 선인이 어느 날 악인으로 변하지 않는다고 누가 말할 수 있는가. 일체현상에는 절대로 변하지 않는, 고정된 실체 또는 불변의 현실이 유지되는 일이 있을 수 없다.
무상무아의 대도에서는 복제의 실험실이 아니어도 실상의 무한한 광명이 참여하는 중중무진의 생명계를 누구나 공유할 수 있다. 메스와 도구가 없는 무문의 실험실, 이심전심 큰 길에 목숨을 거는 일이 늘 화제가 되는 좋은 세상을 위해 촌음을 아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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