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도 노벨문학상을 타야한다는 말이 이야기되고, 노벨상 타기 운동이 시작된 것도 한참 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노벨상을 턱없이 탐하는 것도 천박한 일이고 문학의 본령에 조금은 빗나가는 일이라는 느낌을 가진 사람들도 있다. 사실 문학이 존재하는 이유는 상과 같은 세속적인 것을 넘어가는 데에 있다고 할 수 있다.그런데 노벨상은 여하간에, 우리 문학이 세계적으로 알려지지 않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번역이 없다는 의미에서만은 아니다. 번역은 세계시장에서 세계적인 독자에게 호소력을 가질 수도 있고 아니 가질 수도 있다. 그러나 독자나 시장에 관계없이 한국의 문학 현상이 범세계적인 문학 연구에 제공할 수 있는 통찰과 설명이 있다.
가령 한국인은 시를 어떠한 것으로 생각하였느냐, 전통 한국문학에서 성은 어떻게 다루어졌느냐, 문학작품의 유통경로는 어떠한 것이었느냐, 이것이 문학 표현의 양식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느냐―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연구는, 작품의 호소력에 관계없이 범세계적 문학 연구에 공헌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를 비롯하여 우리 문학의 존재방식에 대한 설명은 설사 국내 연구가 있다고 하더라도, 국제적 학문교환의 장에서는 이야기되는 일이 별로 없는 것으로 보인다.
나는 지난 몇년동안 몇가지 세계 비교문학회의에 나가볼 기회가 있었지만, 이러한 장소에서 한국의 경우들을 대표하는 발표가 너무 적은 것을 발견하고 우리의 국제활동에 중요한 공백이 존재함을 알게 되었다.
문학연구의 세계 진출도 기존 연구의 번역과 선전의 문제라고 할런지 모른다. 그러나 국내 연구의 번역으로 이 문제가 풀리지 않는 것은 우리의 문학적 질문이나 발상법이 국제적 문제의 지평에서 일치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번역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서로 다른 문제와 답변의 영역을 연결하는 새로운 개념화로서의 번역이다.
이러한 일에 관련되는 학문이 비교문학이다. 최근에 비교문학에 대한 관심이 늘어가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금년부터 연세대 대학원에 비교문학과정이 생겼다고 한다(어떤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고려대에서 신청한 것은 교육부에서 각하되었다). 이에 추가하여 필요한 것은 문학연구의 비교화와 통합이다. 오늘날 우리가 하고있는 학문치고 서양학문의 세례를 거치지 아니한 학문은 거의 없다. 정치학이든 사회학이든 경제학이든 철학이든 우리 전통에 그러한 분야에서 독자적 사고가 없었던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들 학문은 서양의 것(그것이 세계적이냐 하는 것은 또 별개의 문제다)을 지나칠 정도로 소화하면서 우리 사회에서의 자리를 새로 닦았다.
한국 문학 연구가 바깥 세상의 학문에 담을 쌓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어폐가 있지만, 세계 현대학문과의 관계에 있어, 다른 학문들과는 전혀 다른 사정 속에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런가하면, 우리나라에서의 외국문학 연구의 국제화에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현대경제가 한두개의 특출난 상품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복잡한 산업구조를 전제하여 가능한 것이라는 것은 널리 인식되어 있는 일이다. 창작되는 문학도 복잡한 문학적 담론의 구조 속에서 만들어진다. 이것은 오늘날에 특히 그러하다. 오늘날의 문학은 자의식이 강한 문학이 되지 아니할 수 없고, 이 자의식은 상당부분 당대의 문학 담론 일반에 의하여 형성된다. 세계적인 문학은 세계적인 문학 담론 속에 존재한다. 이 담론의 매개없이 갑자기 튀어나온 문학적 업적이 현대 문학으로서 세계적인 호소력을 갖는 일은 희귀한 일이다. 이러한 문학적 담론의 구조를 만들기 위해서는 문학 연구와 통합이 있어야 한다. 보다 단적으로 필요한 것은 여러개의 언어와 문학 전통에 능숙하고 국제적 학문 교환에서 한국을 설명할 수 있는 인원의 양성이다. 그리고 국제적 시각에서 우리 스스로를 이해할 수 있는 학문의 성장이다. 이것은 교육과정에서 시작해야 한다. 문학 교육과 연구에 대한 새로운 성찰이 필요하다.<김우창>김우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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