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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을 소설로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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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을 소설로 읽는다

입력
1997.03.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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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식파괴’ 외국소설 두 권 잇달아 번역 출간/불 장 도르메송 ‘거의 모든 것에 관한 거의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등장인물·줄거리없이 고독·권태·욕망 등 형이상학적 담론 서술/영 알랭 드 보통 ‘섹스,쇼핑 그리고 소설’­순간순간 접하는 사물·부닥치는 의식을 ‘정신현상학’ 등 인용 설명소설은 모든 형식의 글쓰기를 그 속에 녹여내는 용광로와 같다. 시 수필 전기, 심지어 개인적 신변잡기나 일기, 딱딱한 학술논문 같은 글도 소설은 자신의 형식에 담아낸다. 그래서 역사, 예술, 환상, 세태, 사 등등 많은 이질적 형용어들이 「소설」앞에 붙고 있는 것이다.

최근 잇달아 번역 발간된 두 외국소설은 여기에 「철학소설」이라 할만한 새로운 글쓰기의 모습을 보태 독자들에게 또 다른 책 읽기의 즐거움을 준다. 프랑스 문단의 거장 장 도르메송(71)의 「거의 모든 것에 관한 거의 아무 것도 아닌 이야기」(문학세계사간)와 스위스 태생의 영국소설가 알랭 드 보통(28)의 「섹스, 쇼핑 그리고 소설」(한뜻간)이 그것.

지난해 초 프랑스에서 출간돼 장기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던 「거의 모든 것에 관한…」(원제 Presque Rien Sur Presque Tout)은 작가가 소설이란 이름으로 부르고 있지만, 어떤 소설적 등장인물이나 줄거리도 없다. 오히려 만물과 무, 고독, 권태, 시간, 자유, 욕망 등의 소제목 하에 형이상학 개론서에나 걸맞을 듯한 내용을 담고 있다.

도르메송은 서문에서 『당신은 천만금의 복권에 당첨된 것이다. 당신이 인간이기에, 그리고 당신이 생각을 할 수 있기에』라고 입을 연다. 그리고는 마치 빅뱅 이후 인간이 생각하고 행동해 온 모든 것들, 그리고 「오로지 인간에 의해, 인간을 통해, 인간만을 위해 존재하기 때문인 만물」에 대한 자신의 백과사전적 지식을 다 쏟아놓아 보겠다는 듯 현란한 서술을 하고 있다.

이게 무슨 소설일까 싶은데, 프랑스에서도 이 책이 베스트셀러에 오르자 소설의 형식 파괴에 대한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고 한다. 도르메송은 책의 중간쯤에 「다음에 이어질 글은 물론 문학사상 처음 있는 일이고, 다음 세기에 영상 앞에서 책이 사라질 운명이라면, 최후의 문학 중의 하나로서, 작가의 것이라기보다는 독자의 것이다」(p.259)라며 자신의 의도를 숨겨놓았다.

하지만 권위 있는 프랑스의 문예지 「마가진 리테레르」의 서평처럼 독자들은 이 작품을 「소설」이라 믿더라도 별로 속았다는 느낌을 가지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처음부터 줄거리를 따라 읽을 필요 없이 그저 아무 때고 손에 잡히는대로 펼쳐 읽어도 소설 읽는만큼 혹은 그 이상의 맛을 주기 때문.

파리 고등사범학교에서 철학을 전공한 도르메송은 「피가로」지 주필을 역임했으며 학술원 격인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으로, 미테랑 전 대통령의 사망시 추도사를 쓰기도 한 인물. 그는 꼬박 2년동안 하루 8시간씩 이 작품을 집필하는데 매달렸다고 한다.

「섹스, 쇼핑…」은 주인공과 줄거리가 있다는 점에서는 「거의 모든 것에 관한…」보다 훨씬 소설적이다. 현재 런던에 살고있는 20대 초반의 앨리스, 그녀는 자신이 매달 구독하는 여러 종의 잡지들―화려하고 깔끔하고 잘 닦은 사과처럼 지질이 좋은 잡지들―속의 세계로 빠져들고 싶어하는, 평범한 여성이다. 소설의 줄거리는 앨리스가 에릭이라는 남자와 사귀다 헤어지고 필립이라는 다른 남자와 사랑을 이룬다는 지극히 통속적인 것이다.

그러나 내용은 여느 연애소설과는 판이하다. 연애 자체보다는 여주인공 앨리스가 사랑의 순간순간에 대하는 사물, 부닥치는 의식에 대한 작가의 철학적 해석이 책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주인공이 주방의 깡통을 따는 장면에서 앤디 워홀의 팝 아트에 관한 이야기가 튀어나오는가 하면, 남녀 주인공이 의사소통에 피로를 겪는 장면에서는 느닷없이 헤겔의 「정신현상학」 한 부분이 인용되고 설명된다. 번역판의 제목(원제는 「The Romantic Movement」)은 작가가 플로베르의 소설 「보봐리 부인」을 세계 최초의 섹스쇼핑 소설이라고 설명하는 데서 따 온 것.

알랭 드 보통은 케임브리지 대학(역사학 전공)을 수석졸업하고 스물세 살 때 쓴 첫 장편 「로맨스」로 세계적 주목을 받은 젊은 작가. 번역자 김한영씨는 『작가는 수억의 인류사가 진전시켜 왔던 예술사의 계통발생을 90년대 런던에 사는 평범한 한 여자의 개체발생으로 확인시키며, 20세기의 평범한 사랑 이야기를 거대한 예술사적 알레고리로 창조했다』고 말한다.<하종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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