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저란 동물이 있다. 몸 길이 70∼90㎝에 무게 22∼28㎏정도의 야행성 동물이다. 뻣뻣한 가시털 등이 온몸을 덮고있어 자칫 고슴도치로 착각하기 쉽다. 이들은 날씨가 쌀쌀해지면 두 마리가 서로 몸을 가까이 하는 방법으로 추위를 이겨낸다. 그러나 몸을 너무 밀착시키면 서로의 가시털이 상대를 찌르게 된다는데 고민이 있다. 그렇다고 지나치게 떨어지면 추위를 이길 수 없다.접근했다가 가시털에 찔려 주춤했던 호저들은 추위를 견딜 수 없게 되면 다시 서로의 간격을 좁혀나간다. 찔리고 떨어지는 행위를 거듭하는 동안 상대의 가시털에 찔리지도 않고 추위도 이겨낼 수 있는 적당한 거리를 찾아내게 된다. 철학자 쇼펜하워는 적당한 간격을 잡으려는 호저의 이러한 고심을 「호저의 딜레마」라 이름짓고 깊은 뜻을 부여했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은 호저만의 문제가 아니다. 동·식물들 모두가 그렇다. 동·식물들은 어지러운 생태계에서 살아남아 종족을 유지, 번식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서로에게 피해를 주지않고 도움이 되는 적당한 거리를 찾아 살아가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정경유착이 전형적인 예다. 정계와 재계는 적당한 거리를 두어야 하는데 가깝다 못해 붙어버렸다. 이젠 너무 붙어 서로의 가시털에 찔려 빈사상태에 빠진 것이 바로 한보사태다. 인간관계에서 적당한 거리 산정문제가 인류학 사회학 심리학적 측면에서 활발히 연구되고 있는 배경을 여기에서도 찾을 수 있다.
정경유착 못지않게 적당한 거리를 잡기 어려운 것이 바로 공직자와 자녀관계다. 공직자가 대통령이라면 현실적으로 문제는 더 복잡하고 어렵다. 대통령의 아들 김현철씨를 둘러싼 각종 설과 의혹이 나라를 뒤흔들고 있는 것도 공인인 대통령과 아들이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데 실패했음을 의미한다.
대통령도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자녀 사랑은 당연하다. 이때 자녀와의 거리는 가까울수록 바람직하다. 그러나 대통령이란 공인으로 돌아갔을 때는 사정이 달라진다. 독선을 버리고 적당한 거리를 찾는 노력, 즉 「대통령의 딜레마」에 빠져 봐야한다. 김현철씨를 둘러싼 각종 설이 떠오르기 시작했을 때 「자중」이란 조치를 취했으면 현재와 같은 아픔은 없었을 것이다.
이것은 각종 의혹의 사실여부와는 관계가 없다. 이 모든 것이 낭설일지 모른다. 그렇지만 이로인해 나라가 혼란에 빠졌다면 그 책임을 면할 수 없다. 대통령이 「아들의 허물은 아비의 허물이다」라고 사과할만큼 사태가 악화했다면 이 상황에서 적당한 거리는 의혹의 진실규명이다.
검찰의 한보사태 수사는 국민과 정부의 거리를 좁힐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금년도 최고의 유행어가 될 것이 확실한 「나는 깃털이다」의 몸체를 찾아냈더라면 잃었던 신뢰를 회복할 수 있었다. 역시 예상대로 검찰의 수사는 「마피아의 총대로 만든 잣대」에 의한 수사란 비난을 면치 못했다. 불행히도 대통령은 검찰과의 적당한 거리 산출에도 실패한 셈이다.
새 총리에 아버지와의 거리가 가장 모범적이라는 고건씨가 임명되는 등 개각이 단행됐다. 고총리는 1만1,000개의 규제를 혁파하고 행정의 투명성을 다짐했지만 개각을 했다고 해서 이반된 민심이 간단히 돌아올 것 같지는 않다. 이것은 한보의혹이 국민의 가슴속에 어려있기 때문이다. 국민이 한보사태를 잊어가고 있다고 생각하면 큰 착각이다. 여당의 참패로 끝난 인천 서구와 수원 장안구의 국회의원 보궐선거가 이를 증언한다.
김영삼 대통령은 「대통령의 딜레마」란 전례없는 숙고끝에 아들을 멀리 내치는 뼈아픈 결정을 했지만 한보의혹은 그대로 존재하고 있다. 대통령은 한보사태 진상규명을 위해 다시한번 「대통령의 딜레마」에 빠져야 한다. 그리고 결단을 내려야 한다. 그러할 때 국민과의 거리도 없어지고 이번 개각도 더 빛이 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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