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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 줄고 교사 없고 학생 감소/벼랑 끝에 몰린 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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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 줄고 교사 없고 학생 감소/벼랑 끝에 몰린 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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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03.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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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예회·일일찻집 해보지만 운영비는 턱없이 부족하고 건물주 눈치 살피기도 지쳐/지난해 서울 10여곳 문닫아야학이 벼랑으로 내 몰리고 있다. 후원의 손길은 줄어 들고 학생과 교사의 충원도 어렵다. 지난해 서울에서만 10여개의 야학이 문을 닫을 정도로 운영난이 심각한 상황이다.

가장 어려운 것은 운영비 부족. 독지가나 출신 교사·학생들이 보내 주는 후원금에 의존하지만 역부족이다. 학생들이 내는 돈은 학기별로 구입하는 교과서 대금이 전부라 교사들이 매월 운영비를 보태고 있다. 대개 대학생 교사는 월 1만∼3만원을 내고 직장인은 직급에 따라 조금씩 더 낸다.

자금난에 시달린 나머지 수익사업에 손을 대는 야학도 늘어 나고 있다. 선후배 야학교사와 학생들의 정기적인 모임을 「일일찻집」 「일일호프」 등의 형식으로 열어 수익금을 운영비로 충당하는 것이 가장 흔한 예.

학생 수가 비교적 많은 서울 상록학교의 경우 매년 한번씩 주변 대학의 강당을 빌려 학예발표회를 갖는다. 학생과 교사들의 창작 연극, 음악, 탈춤 공연 등으로 지역 유지와 학부모, 대학생들이 유료 관객층이다. 그러나 이런 수익금으로는 야학의 기본적인 자금난을 해소하기에는 무리다.

야학의 장소확보 문제도 간단치 않다. 대개 정부기관이나 종교단체에서 무료로 제공하지만 사정에 따라 방침이 바뀌기도 해 야학 관계자는 이 점이 늘 불안하다. 학생수가 적으면 쫓겨나기 십상이므로 인원을 실제보다 늘려 보고하는 예도 있다. 임대 사무실을 이용하는 경우에도 건물주의 양해를 구해 일반 입주자보다 훨씬 싸게 얻기 때문에 항상 건물주의 눈치를 살펴야 한다. 임대료를 올리든가 건물을 다시 지을 경우 다른 독지가를 찾아 나서야 하기 때문이다. 과거 천막 형태의 야학은 장소의 제약이 덜했지만 지금은 아예 생각할 수도 없다.

학생과 교사 충원의 어려움도 운영난을 가중시키고 있다. 전단 광고나 각종 정보지를 통해 모집하는 학생은 지역에 따라 차이는 있으나 대개 20∼30명에 지나지 않으며 그나마 졸업때까지 다니는 학생은 30%를 넘지 못하고 있다.

교사충원은 주로 전임자가 후임을 정해 놓고 나가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지원자가 적어 전전긍긍하는 곳이 많다. 대학생 교사가 넘쳤던 것은 이젠 아득한 옛얘기다. 대학생 교사가 졸업후에도 일을 계속하거나 야학교사 출신의 직장인들이 다시 백묵을 잡기도 한다.

교육에 필요한 기자재 구입은 일체 교사들의 몫이다. 이 때문에 도구가 많이 필요한 실습과목은 야학의 「아킬레스건」으로 통한다. 특히 컴퓨터과목은 대부분이 엄두도 못내고 있다. 일부에서 컴퓨터회사나 일선 학교와 자매결연을 맺어 중고 컴퓨터를 제공받긴 하지만 성능이 떨어져 불편이 많다. 인근 사설학원과 유대관계가 있을 경우 학원장의 양해를 얻어 무료강습을 받기도 하지만 그리 흔한 예가 아니다.

59년부터 야학을 운영해 온 소망야간직업학교 심영준 교장은 『후원금이나 참여하려는 교사와 학생수가 줄고 있는 것보다 더 큰 문제는 야학을 바라보는 우리사회의 편견과 냉대』라고 지적했다.

◎우리나라 야학의 역사/현재는 검정고시 야학이 대다수/1907년 ‘마산 노동야학’이 효시/일제하 계몽·민족주의정신 고취/70년대 생활­노동야학 갈라지기도

우리나라 야학은 1907년 마산 노동야학을 효시로 보는 것이 통설이다. 야학은 민족자존 의식을 일깨우기 위해 애국인사와 청년층이 주도한 「계몽야학」으로 시작돼 일제 탄압기 지하로 들어가 민족정신의 전파통로가 되기도 했다. 이 시기에 발간된 심훈의 소설 「상록수」도 야학을 무대로 하고 있다.

해방과 한국전쟁으로 한때 끊어진 야학의 맥은 50년대말 농촌과 도시 빈민을 대상으로 다시 이어졌다. 60년대에는 농촌지역에서 번창했으며 도시에서는 검정고시 교육을 담당하는 비정규 교육기관으로 자리를 잡았다.

70년대는 검정고시 교육을 위주로 했던 야학의 운영방향에 일대 변화가 일어났던 시기. 실생활 및 교양에 중점을 둔 생활야학과 노동자들의 의식을 일깨우기 위한 노동야학이 큰 영역을 차지했다. 특히 유신정권 이후 학원에서 추방당한 운동권 학생들이 대거 야학으로 뛰어들어 노동야학붐을 더했다.

노동야학으로 탈바꿈하지 않은 검정고시 야학은 대부분 전수학교 공민학교 등으로 흡수돼 정통 야학은 감소일로에 들어 섰다. 80년대에 이르러 계몽 목적의 야학은 농촌에서는 아예 자취를 감추었고 도시지역 빈민가와 공장 밀집지대에 일부 남아있는 정도였다. 노동야학의 확산에 따라 야학출신 노동자들의 현장활동도 두드러져 갔다.

「야학은 곧 노동운동」이라는 시각이 팽배해진 것도 이때였다. 결국 83년 야학의 대학생 교사들이 경찰에 대거 연행되는 이른바 「야학연합회 사건」을 계기로 노동야학은 대타격을 받았고 점조직 형태의 지하야학까지 등장했다.

노동야학의 퇴조기미는 80년대 후반에 들어 뚜렷한 경향으로 자리잡았다. 노동자들의 교육욕구가 다양해진 데다 야학이 아니더라도 노동현실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통로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야학의 메카인 구로공단 지역에서도 노동야학은 하나 둘 사라져 갔다. 다시 검정고시 야학이 고개를 들게 됐고 이들을 절충한 생활야학도 변화한 사회욕구에 맞춰 새롭게 자리를 잡았다. 90년대의 야학은 일부 독지가나 종교단체의 후원으로 간신히 명맥을 이어가고 있으나 절대적인 감소추세. 사설 학원의 증가로 학생수도 현저히 줄어 들어 기존 야학간의 통합도 시도되고 있다. 현재는 검정고시 야학이 절대 주류를 차지하고 있는 가운데 생활야학과 노동야학은 검정고시 야학의 한 프로그램으로 흡수됐다. 「없어지기 위해 존재한다」는 야학이지만 사회적인 무관심 속에서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상록학교 교무주임 최대천씨/“공무원이 무슨…” 주위 반대 딛고 국내 최대 야학과 결혼한 노총각/‘무료 종합교육센터’ 설립이 꿈

서울 동대문구 청량 2동 사무소 민원봉사계장(6급) 최대천(49)씨. 대학생 자녀가 있을 법한 나이지만 아직도 총각이다. 스스로 『야학과 결혼했다』고 말할 정도로 20여년동안 「상록학교」 설립자로서 살림을 도맡아 왔다. 재산이라곤 10평짜리 시영아파트가 전부일 만큼 모든 것을 야학에 쏟아 부었다.

최씨는 서울시 공무원으로 첫발을 디딘 75년 당시 근무지인 이문1동 사무소건물 2층에 야학 간판을 단 뒤 이듬해 정식으로 문을 열었다. 8명의 교사와 36명의 학생으로 조촐히 출발한 상록학교는 86년 현재 위치인 휘경1동으로 옮겼고 그동안 500여명의 교사와 6,000여명의 학생이 거쳐간 우리나라 최대 야학으로 성장했다.

『개교당시만 해도 책걸상도 없이 교실 바닥에 가마니를 깔고 수업을 했습니다. 그러나 여러 고마운 분들의 도움덕에 지금은 컴퓨터를 비롯한 각종 교육기자재가 갖춰져 있고 지방으로 수학여행을 다녀 올 정도로 발전했지요. 출신교사와 학생들이 보내주는 후원금이 가장 큰 힘이 됩니다』

줄곧 교무주임 겸 국어교사를 맡아 온 그가 야학을 세운 것은 글을 모르던 어머니의 영향이기도 했다. 편지가 와도 읽지 못해 답답해 하던 모친을 보고 배움의 한을 지닌 많은 사람들을 문맹에서 벗어나게 해야겠다고 생각한 것.

『공무원이 무슨 야학이냐며 가족과 친지들이 반대할 때가 가장 난감했습니다만 이제는 모두가 훌륭한 후원자가 됐습니다』 공무원으로 야학에 참여하다 보니 개인적으로 어려움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래도 대학생 교사들이 경찰에 연행됐을 때 공무원 신분을 십분 활용, 이들을 빼내기도 했고 지역 유지들과 자연스럽게 유대를 맺기도 했다. 그러나 경직된 공무원사회에서 최씨는 늘 눈밖에 난 「문제아」였다.

『야학때문에 공직생활을 소홀히 한다는 오해를 살까 봐 근무시간에는 절대 야학관련 일은 삼갔지요. 항상 바쁘게 뛰어다니며 일해 「발발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지만 근무평가는 번번이 낙제수준이었습니다. 공무원으로서 주어진 일을 팽개치고 야학에 참여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제손으로 세운 야학을 소홀히 할 수도 없어 심적 고통이 심했습니다』

그의 꿈은 태어나서 성인이 될 때까지 무료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종합 교육센터의 설립. 반쯤은 꿈을 이루었지만 나머지 반을 실현하기 위해 지금도 낮에는 시민의 공복으로, 밤에는 서민들의 교사로 바쁘게 뛰고 있다.<염영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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