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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개적 양심찾기’ 실패/김이영 한양대 의대 교수(화요세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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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개적 양심찾기’ 실패/김이영 한양대 의대 교수(화요세평)

입력
1997.03.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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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동대로 14차선 차 모두 신호 지키면 선물/TV개그맨 선언에 처절한 모멸감 느껴야주말 TV코미디의 한토막인 「이경규가 간다. 숨은 양심을 찾아서」에서 개그맨 이경규씨는 『지금까지는 몰래 숨은 양심을 찾았지만 이번에는 공개적으로 찾겠다』고 선언했다.

지금까지 카메라도, 장소도, 시간도 알리지 않고 교통신호를 지키는 사람을 찾았지만 『2월26일 아침에 왕복 14차선인 영동대로에서 14대의 차가 동시에 모두 신호를 지키면 14개의 양심 냉장고를 선물하겠다. 아는 사람끼리 짜고 나와 성공해도 상을 주겠다. 그 결과는 3월2일에 방송하겠다』고 2월23일 저녁에 방송했다.

정답을 가르쳐 주고 그것을 맞히면 상을 주겠단다. 기가 찰 노릇이다. 누구의 발상인지는 몰라도 사람을 우습게 보기가 너무 지나치다는 생각이다.

그 속내를 살피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된다.

『서울에서 차를 몰고 다니면서 으스대는 사람들아, 제발 좀 웃기지 마라. 나는 당신들이 사람답지 못한 하찮은 존재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공개적으로 해도 14대의 차가 완벽하게 동시에 같은 장소에서 신호를 지키지 못한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내말이 틀려서 혹시 그런 일이 있더라도 대여섯 시간에 한번 정도나 있을 것이다.

그런 주제에 정치가 어떻고, 교육이 어떻고, 부정이 어떻고 하면서 나라 걱정하는 척 떠드는 꼴을 차마 눈뜨고는 못보겠다. 딴 사람은 몰라도 최소한 차를 모는 사람은 제발 난 척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이 철면피들아!』

대강 이런 식으로 번역해도 된다는 생각이다. 서울의 운전자들은 정답을 보여주고 문제를 내도 맞히지 못할 열등인간들이라는 모욕적인 선언이기도 하다.

그의 이 선언을 듣고 여러 반응들이 있겠다. 별 생각없이 『하하! 그것 재미있겠다. 다음에 꼭 보아야지』하는 물색없는 사람도, 『맞아! 우리나라 사람들 참 큰일이야. 교통신호 하나 지키지 못하고…』하면서 탄식하는 우국지사도, 『그 코미디 아이디어 하나는 기막힌데!』라며 기발한 발상에 감탄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그 뜻을 그래도 좀 생각하고 나서 『코미디언 주제에 사람을 그렇게 모욕해도 되는거야, 건방지잖아. 그래 너는 얼마나 신호를 잘 지키냐?』면서 분개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렇게 분개하다가 자신의 운전습성이 머리에 떠오르면서 금방 자괴감에 빠지는 사람도 있겠다.

나로 말하면 그 말을 듣는 순간 뒤통수에 꽂히는 칼침을 느꼈다. 『당신 글깨나 쓰는 모양인데 당신도 할 말 없지!』라고 놀림을 받는 기분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렇게 내 자존심을 뭉개버린 그에게 반박할 수 있는 어떤 자료도, 논리도 가지지 못한 자신에 대한 무력감에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그 방송을 본 사람 가운데 위에 열거한 여러 반응 중에서 어떤 반응을 보이는 사람이 많았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나의 기분을 말했을 때 『당신은 왜 그렇게 배배 꼬아서 생각해. 그게 뭐 그렇게 중요하다고. 그냥 넘어가 버려!』라고 핀잔을 맞은 것을 보면 『난타당한 자존심 어쩌구』하는 것은 나의 공연한 과잉반응은 아닌가 하는 의문도 있다. 다들 무심히 넘겨버리는데…. 이렇게 자위하니 좀 편해지긴 한다.

그런데 이렇게 자위하고 지나쳐도 되는 것일까.

깊이 생각해봐도 되지 않을까. 그정도 소리에 자존심이 상하지 않도록 철판을 깔아도 되나. 그저 잘못하는 일은 남의 탓이고 내 행적은 몰라라 해도 되나. 각 언론에서 하루에도 수없이 쏟아져 나오는 이경규씨 식의 비판은 그저 코미디로 치부하면 되나. 만화는 만화니까, 가십은 가십이니까, 칼럼은 제멋대로 지껄이는 것이니까, 사설은 그 신문사의 주장일 뿐이니까, 다 제 밥벌이 하느라고 하는 짓들인데 일일이 신경쓸 필요가 없다는 말인가.

아니다. 그렇지 않다. 우리는 이경규씨의 말에서 처절한 자기 모멸감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참고로 밝히자면 2월26일 내기의 결과는 예측한대로 실패였다.<정신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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