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소련독재정권이 휘청거리기 직전 1년 사이를 두고 현직 공산당서기장이 내리 3명이나 죽어 소련정부를 장례정권이라고 불렀었다.북한은 95년 2월 오진우 인민무력부장(국방부장관)이 폐암으로 사망했고 뒤를 이어 인민무력부장이 된 최광이 지난 2월21일 사망하고 다시 김광진 인민무력부 부부장도 최광 사망 불과 1주일만인 2월27일 죽어 북한군은 장례군부가 되고 있다. 이들은 모두 6·25전쟁을 치른 북한인민군간판스타들일 뿐 아니라 과거의 김일성정권 그리고 현 김정일정권을 지탱하고 있는 독재체제의 뼈대들이었다.
오진우는 6·25당시 인민군 제766연대라는 유격연대를 이끌고 강릉 삼척해안을 기습했었다. 뒤에 포항지역에서 역시 기습상륙전을 벌였으나 두번 다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전쟁후 인민군 3사단장을 맡으면서 승승장구하여 총참모장과 인민무력부장까지 올라갔었다.
최광은 오진우보다 2세 아래이나 군경력이 빨라 6·25때 인민군 제13사단장이 되어 중부전선을 넘어 남진한 후 대한민국의 운명이 풍전등화처럼 위급해졌던 다부동전투의 인민군주력부대로 싸웠었다. 당시 다부동전투는 국군 제1사단이 주력방어선을 맡고 있으면서 악머구리처럼 달려드는 인민군과 맞서 처절한 싸움을 벌이다가 미28사단의 신형 155㎜포의 위력에 힘입어 힘겹게 방어에 성공한 전투였다. 다부동전투를 기점으로 국군은 후퇴에서 전진으로 갔다.
최광에 이어 사망한 김광진은 남북고위급대표로 서울에 2번이나 온 얼굴인데 서울에 왔을 때 자신은 6·25때 포병연대장으로 대구전선까지 내려온 일이 있다고 말한바 있었다.
북한군은 한국군과는 달리 한번 장군이 되면 정년없이 죽을 때까지 장군으로 남는다. 이들의 긴 군경력은 군의 융통성을 저해하는 요인이 된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전투경험을 통한 경험적 군사지식을 북한전군에 확산하고 적용하는데 많은 공로를 끼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인민군장성 650여명중 6·25참전경험자가 아직 100명이상 남아있다. 북한군이 강성주의 또는 독재권력의 버팀목역할에서 벗어나려면 장례군부사태가 더 오래 계속돼야 할 것같다.<논설위원실에서>논설위원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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