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드롬’에 신들린 사회/공주병·전생·EQ·애인…/‘튀는 것’이면 예외없이 열병처럼 번지는 대중문화의 허무한 거품들가히 「신드롬의 사회」요, 「신드롬의 문화」다.
90년대 들어 우리 사회와 문화, 특히 대중문화에서 이야깃거리가 되었던 사안마다에는 신드롬이라는 말이 붙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다. 오죽하면 「신드롬 신드롬」이라는 말까지 생겼을까.
신드롬이 어느 정도 신드롬을 일으켰는지는 언론에 나타난 신드롬들을 일별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올해도 지난해부터 이어진 아버지 신드롬이 계속되고 있다. 노동법 사태 이후 파업 신드롬이란 말도 생겼고, EQ(감성지능지수) 바람도 신드롬화의 기미를 보이고 있다. 일본의 권위있는 문학상인 아쿠타가와 상을 수상한 유미리씨의 작품이 잇달아 소개되고 연극, 방송으로 극화하자 유미리 신드롬이라는 조어까지 나왔다.
연초부터 가수들의 자살과 자살 기도로 촉발된 스타·자살 신드롬으로 문을 연 지난해는 유난히도 신드롬이 홍수를 이룬 한 해였다. 한해의 10대 신드롬을 정하는 자리까지 있었으니 말이다. 서태지와 아이들이라는 가수의 은퇴도 신드롬을 빚었고, 애틀랜타 올림픽이 계속되는 동안에는 사람들이 밤잠 안자고 TV 보느라 건강을 해칠 우려가 있다며 올림픽 신드롬을 염려하는 목소리도 나왔다. 사실상 올림픽 최대의 스타가 된 레슬링 경기 해설가 김영준씨는 빠떼루 신드롬을 만들어냈다.
한 정신과 의사의 「전생여행」이라는 책과, 소설 「천년의 사랑」, 영화 「은행나무 침대」, 방송극 「X파일」 등에서 비롯된 전생과 환생의 신드롬은 90년대 문화의 큰 주제가 되다시피 한 채 계속중이다.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으로 국민들은 공비 신드롬에 시달려야 했다.
그 어느 신드롬보다 큰 신드롬의 바람을 몰고 온 것은 단연 애인 신드롬이었다. 한 방송드라마가 몰고 온 열풍은 주인공 탤런트가 입은 옷, 장신구 흉내 내기에서 『나도 애인을 갖고 싶다』는 정신적 신드롬을 부추겼다. 그리고 온 국민을 한번쯤은 공주와 왕자로 만든 공주병 신드롬, 동명 소설과 명예퇴직·감원의 바람을 탄 아버지 신드롬이 이어졌다.
신드롬은 사전적으로는 어떤 병리적 증후군을 가리키는 말. 신드롬의 홍수에 빠진 우리 문화는 그 자체가 어떤 중병에 걸린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 문화를 상업적 의도에서 재생산하고 부추기는 사회 분위기는 그 병인일 수도 있다. 우리의 정신을 안정적으로 가라앉히고 거기에서 삶을 고양시키는 동력을 얻도록 하는 것이 문화의 본질이라면, 속된 말로 「튀는」것을 끊임 없이 부추기고 대중을 거기에 휩쓸리게 하는 신드롬문화는 문자 그대로 반문화이다.<하종오 기자>하종오>
◎TV는 ‘신드롬 제조기’/사회병리 꼬집기 보다 스타·유행만들기 앞장
신드롬은 「탄생」하지 않는다. 만들어진다. 결국 누군가가 신드롬을 조장하고 부추긴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TV다.
지난해 방송가를 휩쓴 주역은 「스타」가 아니다. 바로 신드롬이다. 공주병 신드롬, 애인 신드롬, 아버지 신드롬, 전생 신드롬….
「시대의 흐름을 담아내는 그릇」이라는 방송이 신드롬에 집착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신드롬만큼 자연스럽고, 설득력있게 사람의 마음을 파고 드는 소재가 또 있을까?
하지만 TV는 거대한 물줄기와 같은 신드롬의 특정 부분에만 지나치게 집착, 그 안에 담겨있는 메시지를 오히려 왜곡시킨다. 특히 한번 「장사가 된다」 싶으면 끝간 데를 모르고 그 재생산에 매달려 공기로서의 품위마저 저버린다.
방송작가 김남씨 등은 방송작가회보 올 2월호에서 「신드롬 제조 부추기는 한국방송」이라는 기고를 통해 상업주의에 빠져 신드롬을 부채질하는 방송의 제작관행을 비판했다.
명예퇴직 바람으로 등장한 「고개숙인 가장」을 반영하는 아버지 신드롬의 경우 하나같이 직장에서 쫓겨난 아버지가 좌절과 서러움을 씹으며 절망하거나 심지어 자살까지 감행하는 식으로 묘사된다. 명예퇴직을 절망의 출발점으로만 보는 단선적인 사고, 그것은 「값싼 감상」만을 조장하는 것이다.
방송비평가들은 『아버지의 아픈 가슴을 어루만지는 척 하면서 오히려 그들을 한계상황으로 잔인하게 내몰았다』며 『「나약한 아버지」가 문제라면, 오히려 「강인한 아버지상」을 제시하는 것이 바람직한 자세』라고 지적했다.
김자옥이 몰고 온 공주병 신드롬도 마찬가지. 자기 자신만 아는 개인주의적 발상의 공주병 신드롬은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병리적 징후임은 분명하지만 지나치게 웃음만을 남발, 이 병리를 꼬집기보다는 거꾸로 심화 내지는 미화시켰다는 지적도 많다.
공주병 신드롬의 진원지인 MBC 「오늘은 좋은날」의 안우정 PD는 『지난해 10월 이후 3개월간 하루 평균 20∼30건의 전화를 받았다. 모두 공주병 신드롬을 소화하기 위한 타 방송사와 잡지의 전화』라고 말했다. 그는 『신드롬에 드리워진 사회적 메시지를 제대로 보여주고, 보다 나은 방향을 제시해야 하지만, 방송은 올해도 어김없이 또 다른 신드롬을 토해낼 것』이라고 말했다.<박천호 기자>박천호>
◎돈·창업·조선왕조…/출판계도 신드롬 열풍
유행의 바람을 타는 출판계도 신드롬을 만들어내고 전파시키는 진원이다.
최근 출판계를 배회하는 최대의 신드롬은 단연 명예퇴직과 그에 따른 창업신드롬. 「명예퇴직제」를 설명하는 책들은 물론 「돈 버는 데는 장사가 최고다」 「돈 없는 사람도 창업을 할 수 있다」 「돈이 보이는 인터넷 마케팅」 「창업쿠데타」 등에서 「돈 세라 세라」는 책까지, 창업으로 돈 벌 것을 권하는 돈바람이 불고 있다. 돈 신드롬이라는 말까지 생기지 않을까.
김정현씨의 소설 「아버지」는 대형서점 베스트셀러 1위의 자리를 굳건히 지키면서 아버지 신드롬을 주도하고 있다. 창고에 쌓여있던 유사 서적들도 먼지를 털고 서가에 얼굴을 내밀기도 한다.
전생·환생신드롬을 일으킨 정신과의사 김영우씨의 「전생여행」과 양귀자씨의 소설 「천년의 사랑」도 많이 팔리는 책이다. 이와 관련, 스테디셀러가 된 「천상의 예언」을 비롯해 「문명의 종말」 등 미국 뉴에이지(New Age) 사조의 영향을 받은 듯한 책들이 최근 많이 나오는 것은 세기말의 분위기를 반영하는 징후.
출판 부문에서만 특이한 신드롬 같은 현상도 눈에 띈다. 조선시대를 다룬 각종 책들이 쏟아지고 있는 것이 대표적. 베스트셀러가 된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해 「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어 그래―조선왕조실록」 「이야기 조선왕조사」 「새로 쓰는 조선인물실록」 등 종래의 왕조사만이 아닌 사회사, 생활사적 측면에서 조상들의 이야기를 다룬 책들이 성공을 거두고 있다.
시오니 나나미의 열풍도 빼놓을 수 없는 경우다. 「로마인 이야기」의 대성공은 출판계에 때 아닌 나나미 신드롬을 일으켰다. 이후 「르네상스의 여인들」 「나의 친구 마키아벨리」 등 그의 저작들이 속속 번역출간되고 있다.<하종오 기자>하종오>
◎전문가 진단/김성기 문화평론가/냄비사회의 집단 카타르시스
뭔가 수상쩍은 일이 진행되고 있다. 튀는 것이면 뭐든 신드롬이라 불리는 판국이다. 전생, 죽이기, UFO, 세기말, 공주병, 아버지, 복고…. 작년에 이어 올해로 이월된 신드롬의 물결은 90년대의 집단 무의식을 슬며시 드러낸다. 저간 인식의 자장에 잡히지 않던 낯설고 기이한 현상에 대한 열광과 두려움이 뒤범벅되고 있는 것이다. 과연 우리네 삶은 신드롬의 나날을 보내고 있는가.
신드롬이란 원래 정신 장애의 증후를 가리키는 말이다. 과대망상증이 그 한 예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그것이 우리의 눈길과 의식을 장악하고 있다. 미디어는 신드롬을 찾고, 거품이 굳을 때까지 휘젓고, 되삼키고, 재삼 소화하고 그리고 또 한번 그것을 내뱉는다. 대중 역시 마찬가지다. 각종 신드롬의 풍문에 매달려 안달한다. 이런 강박 속에서 신드롬은 일종의 유행성 바이러스처럼 급속히 퍼져나간다.
방금 「신드롬 문화」라 부를만한 추이를 지적한 셈이다. 사회문화적으로 문명 장애가 있다는 말이다. 모종의 사태에 대한 비이성적 대응 내지 반응이 난무하는데, 이는 우리 문화가 자체의 구심력을 유지하지 못하고 수프마냥 무정형의 상태에 처해 있는 탓이다.
이런 상황에서 개개인이 자신의 뿌리나 의식의 중심을 발견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바깥의 자극에 쉬 쏠리게 마련이다. 전통적 스타일의 안정된 인성보다는 표출적인 개성에 대한 요구가 높아지는 것도 그 때문이다. 요컨대 신드롬 문화란 카오스 시대에 직면한 우리 사회가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해 채용한 집단적 카타르시스의 한 형식으로 볼 수 있다.
한편 신드롬 문화는 현대 소비사회의 정서적 무드와도 깊은 연관이 있다. 낯설고 기이한 것, 새로운 미지의 것에 대한 우리네 열정에서 혹 낭만주의의 부활을 엿보게 된다. 낭만주의의 고향은 19세기 말이다. 그 당시 낭만은 저항과 전위와 같은 의미를 지녔으나 오늘의 소비사회에서는 한낱 향수나 이국정서로 퇴행하고 있다. 다른 것을 같게 보이게 하고, 같은 것인데도 다르게 느끼게 하는 테크닉으로 전락하고 있다는 뜻이다.
세기말이라고 한다. 이해 불가능한 현상이 인식의 테두리 바깥으로 넘쳐 흐른다. 마침내 우리는 기댈 곳을 잃는다. 이때마다 주기적으로 혜성처럼 나타나는 신드롬. 그것은 어느 면 위안이기도 하지만 종국에는 백일몽과 환멸을 자아낼 뿐이다. 올해 우리 냄비사회를 뜨겁게 달구었다 식혔다 할 신드롬은 또 무엇일까요. 이는 독자 퀴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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