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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상자’들/김석만(1000자 춘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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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상자’들/김석만(1000자 춘추)

입력
1997.03.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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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는 속담이 있다. 하지만 기억이 담겨있지 않는 이름은 의미가 없다. 경치 좋은 곳의 바위에 어지럽게 새겨진 이름들은 아무 기억을 주지 못하기 때문에 그저 낙서로만 보인다. 그러나 광주 망월동 『여보 당신은 천사였소』라는 묘비명의 임자는 이름 석자보다 더한 기억을 남겨준다. 지진을 경험한 사람들에게 위급한 순간에 밖으로 가지고 나올 물건으로 무엇이 가장 적합하냐고 물으면 대부분 사진첩이라고 한다. 삶의 근거가 송두리째 사라져 버려도 과거의 기억을 가지고 새로운 삶을 살아갈 힘을 얻게 된다.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지 못하도록 강요받은 삶은 가장 괴로운 삶일 것이다. 우리의 현대사는 과거의 기억을 잊고 살아가도록 강요한 역사이다.전쟁 피난 이농 이민을 겪은 사람들은 더이상 들추어내고 싶지 않은 기억들을 안고 살아간다. 비유컨대 고향을 떠난 사람들은 모든 세간살이를 가지고 갈 수 없어 일부를 추리듯이, 대부분 삶의 기억 중에서 일부분을 추린 다음 나머지 가슴 아픈 상처의 기억들은 상자에 잘 포장하여 대동강이나 원산 앞바다, 목포 앞바다와 추풍령과 문경새재, 또는 김포공항 활주로에 묻고 떠난다. 최소한 해방 이후 반세기 동안 『뒤는 돌아보지 말고 앞만 바라보며 살자』고 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아직도 피난민이다. 늘 쫓기고 불안하며 매일 매일 패잔병처럼 귀가한다.

다가올 미래에는 여러 인종이 언어와 문화를 공유하면서 어울려 살게 될 것이다. 서로 다른 인종이 서로의 과거의 기억을 모르면서 어떻게 잘 어울릴 수 있겠는가? 자신의 기억도 떠올리지 못하며 어찌 가슴을 열고 남들과 어울릴 수 있겠는가. 피난생활도 끝내지 않고 세계화나 뉴미디어 같은 환경에 순조롭게 적응할지 의문을 품게 된다.

새로운 세기를 준비하기 위하여 과거의 상처를 깊이 들여다 보는 일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그건 이 나라 방방곡곡에 묻혀 있는 기억의 상자를 열어보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예술의 새로운 사명도 바로 아픈 상처의 기억을 들추어 내고 이를 감동적으로 그림으로써 정서적 화해를 경험하게 하는 것이라고 믿는다.<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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