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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업적 기리는 기념관을 건립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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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업적 기리는 기념관을 건립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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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03.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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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이라곤 경교장이 유일/유·무형 정치적 압력에 추모열기 국민운동 승화 못해국내에는 백범 김구 선생의 발자취를 더듬어 볼 유적이나 기념물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 사학자들과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관계자 등은 『백범의 위업을 인정하지 않던 그릇된 풍토 탓에 선생의 뜻을 기릴 수 있는 공간이 전무한 형편』이라며 안타까움을 표하고 있다.

현재 국내에 남아있는 백범의 유적은 45년 귀국후 49년 서거할 때까지 머물렀던 경교장이 거의 유일한 실정이다. 이마저도 바깥벽에 「김구 주석이 사시다 서거하신 곳」이라는 표지만 남아있을 뿐 내부가 당시의 모습과는 딴판으로 개축돼 역사의 현장이라고 하기 어렵다.

경교장은 백범 서거후 한국전쟁때까지는 대만대사 관저로, 휴전후에는 월남대사 관저로 쓰이다 68년 고려병원(현재 강북삼성병원)에 인수돼 지금까지 본관건물로 사용되고 있다. 지난해에는 병원 측이 증축을 위해 경교장을 다른 곳으로 옮겨 예전 모습대로 복원한다는 계획을 세웠지만 서울시와 기념사업협회 등이 『위치를 옮기면 역사적 가치가 없어진다』고 반대해 무산됐다.

이밖에는 기념사업회와 독립기념관에 보관된 유품과 저작, 그리고 경기 의정부시 회룡사 경내 등에 산재한 휘호 정도가 남아있을 뿐이다. 특히 백범이 귀국후 인재 양성을 위해 세웠던 학교들은 흔적조차 사라졌다. 백범은 49년 서울 금호동에 「백범학원」, 염리동에 「창암공민교」를 세웠지만 현재는 작은 표지조차 남아있지 않아 당시 학교설립에 관계했던 측근들조차 장소를 알아 볼 수 없을 정도이다.

전문가들은 백범의 유적이 보존되지 않은 가장 큰 이유를 국내 정치상황에서 찾는다. 백범에게 건국훈장이 추서된 것도 건국후 14년이나 흐른 62년의 일이었다.

숙명여대 한국사학과 이만열 교수는 『백범에 대한 학술적 조명 등 기념사업과 유적보존 노력이 생전의 업적에 비해 미진했다』면서 『백범에 대한 추모열기가 국민운동으로 승화하지 못한데는 유·무형의 정치적 압력이 가장 큰 이유였다』고 설명했다.

사학자들과 기념사업협회 관계자들은 백범의 업적을 상징할 수 있는 기념관 건립을 최우선 현안으로 꼽는다. 인하대 사학과 윤병석 교수는 『백범의 사상이나 업적을 온 국민에게 널리 알리는 일은 민족교육에 더할 나위 없이 도움이 될 것』이라며 『이를 위해 유품전시와 학술활동의 장이 될 기념관의 건립이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지난해 8월에는 각계인사들이 백범기념관건립 범국민추진위원회를 결성해 서거 50주년이 되는 99년 기념관을 완공한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기념관 건립의 가장 큰 난관인 기금문제로 아직 사업계획을 확정하지 못하고 있다. 건립에는 100억원 이상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되지만 국민성금 모금 외에는 별다른 조성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국가보훈처도 지원계획을 세우고 있지만 사업계획이 확정된 이후에나 지원규모를 결정할 예정이다.

기념사업협회의 선우진 상임이사는 『지금까지 전 국민의 성원으로 국내외의 유품을 꾸준히 수집해 역사적 문화적 가치가 큰 것도 상당수 확보했다』면서 『소중한 유품을 한자리에 전시하기 위해서는 정부와 민간의 관심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독립운동가 이용상씨/중국인들의 백범 사랑이 저런데 우린 뭘 했나

지난해 10월 나는 가깝게 지내는 한 선배로부터 소중한 얘기를 듣고 야릇한 흥분을 느꼈다. 중국 정부가 1932년 일본경찰의 추적을 받던 백범 김구 선생이 한때 피신했던 저장(절강)성 자싱(가흥)·하이옌(해염)의 은신처를 찾아내 수리한 뒤 유적지로 지정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복받치는 감격을 억누를 길이 없어 2개월 뒤 중국으로 떠났다. 65년전 김구 선생이 3시간 넘게 타고 간 상하이(상해)발 자싱행 열차는 2시간이 안돼 자싱역에 도착했다. 그날 저녁 삼륜차를 타고 컴컴한 거리로 나섰다. 당시 상하이를 빠져 나온 김구 선생이 낯선 땅에서 느꼈을 감회를 다소나마 더듬어 보고 싶어서였다.

이날 아침 자싱 피신처를 찾아간 나는 대문앞에 이르러 저절로 무릎을 꿇었다. 나도 모르게 땅을 치며 통곡했다. 내부는 깔끔하게 단장돼 있었다. 위험을 무릅쓰고 이웃나라의 혁명가를 숨겨 준 중국인의 정성과 유적지를 깨끗이 복원해 보존한 중국당국의 정성이 너무도 고마웠다. 한편으로 『우리는 그동안 뭘 했나』 하는 생각에 부끄러움을 금할 길이 없었다.

하이옌 피신처는 건평이 60여평이나 됐다. 현관에 들어 서 근엄한 표정의 김구 선생 흉상을 대하고는 또다시 울었다. 민족의 독립과 통일을 위해 평생을 바치신 선생의 뜨거운 민족사랑이 그리웠고 왠지모를 설움도 끝이 없었다.

민족의 통일문제가 현실성 있게 거론되는 요즈음 더욱 거인으로 우리앞에 자리해야 마땅한 선생의 풍모. 적어도 자싱과 하이옌의 피난처에서는 선생의 모습이 그대로 살아 숨쉬고 있었다. 자싱과 하이옌 사람들이 아직도 선생을 기억하고, 또 사랑하고 있는 모습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날로 선생의 기개와 민족에 대한 남다른 사랑을 잊어 가고 있는 우리 스스로의 모습을 자싱과 하이옌의 중국인들에게 무엇이라 설명할 수 있을 것인지. 답답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었다. 그저 복잡한 심사가 뒤엉켜 뜨거운 눈물만 하염없이 솟아 올랐다.

◎백범수행 엄항섭 선생 장녀 엄기선씨/백범·선친의 뜻 통일로 꽃피길/고난의 임정 피난 길 꿋꿋이 기개 잃지않아

『자싱(가흥)을 시작으로 난징(남경) 창샤(장사) 광둥(광동) 중칭(중경)으로 이어졌던 임시정부의 피난길은 고난의 연속이었어요. 그 와중에서도 꿋꿋하게 기개를 잃지 않으셨던 백범 선생과 선생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의 말씀이 제 삶의 지표가 되었어요』

상하이(상해) 임시정부 시절부터 49년 서거때까지 백범을 최측근에서 보좌했던 엄항섭(50년 납북) 선생의 장녀 엄기선(68·대전 루시모자원장) 여사는 임정시절 백범 선생의 모습을 뚜렷이 기억하고 있다.

윤봉길 의사의 홍코우(홍구)공원 폭탄투척 의거이후 쫓기는 몸이 됐던 임정요인들이 처음 찾아간 곳인 자싱의 피난처에서 엄여사 가족은 이동녕 이시영 선생 등 요인들의 뒷바라지를 도맡았다.

『백범 선생은 당시 항저우(항주)와 자싱을 왕래하면서 뜻있는 동지들을 모으고 중국정부와의 협상에도 참여하셨답니다. 자싱의 임정 피난처에 오셔서 휘호를 쓸 때면 제가 먹을 갈아드리곤 했지요. 백범 선생은 어려웠던 시절에도 어린 저희들에게 교육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것을 잊지 않으셨어요』

엄여사에게는 곽낙원여사의 인상이 더욱 뚜렷이 남아있다. 『언젠가 생신날 백범 선생이 생신상을 차려 드리려 하니까 할머니(곽여사)께서 「그 돈으로 청년들에게 총 한자루라도 더 사주는 것이 독립에 도움이 된다」고 하셨어요. 순간 「조선여성의 갈 길이 저것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지요』

엄여사는 9살때인 38년부터 광복군의 전신인 광복전선 청년전지공작대에 입대해 여성독립운동가의 길을 걸었다. 43∼45년에는 중국방송을 통해 일본군내 한인들과 국내동포를 대상으로 일본의 패망이 눈앞에 왔음을 알리는 선전공작을 담당했다.

『백범 선생 서거후 우리 가족들이 겪은 고초는 말할 수도 없어요. 형사들이 집주변을 지키면서 외출을 못하게 해 학교에도 다닐 수 없었습니다. 선친에게 정계진출을 미끼로 회유책을 쓰기도 했지만 완강히 거부하셨지요』

엄여사 가족이 공로를 인정받은 것은 고작 몇년 전. 자진월북한 것으로 오인받았던 엄항섭 선생은 89년에야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엄여사의 어머니 연충효(80년 작고) 여사는 이듬해인 90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와 함께 국립묘지에 안장됐고 엄여사 또한 93년 여성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았다.

엄여사는 해방후 서울대 문리대를 졸업하고 교편을 잡다 70년부터 불우한 미망인과 그 자녀들을 보살피는 루시모자원 원장으로 취임, 사회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같은 민족에 의해 희생당하신 백범선생과 선친의 거룩한 뜻이 민족통일이라는 꽃으로 피어났으면 좋겠다』는 것이 그의 마지막 소망이다.<이상연 기자>

□백범 약력

▲1876년 8월29일=황해도 해주읍 백운방 텃골(현 황해도 벽성군 운산면 오담리 파산동)에서 출생. 부 김순영, 모 곽낙원, 아명 창암

▲1893년=동학 입도

▲1896년=황해 안악에서 일본 육군중위 쓰치다를 살해하고 사형을 선고받음

▲1898년=탈옥(3월). 공주 마곡사에서 승려가 됨(법명 원종)

▲1903년=기독교 입교

▲1911년=안명근사건으로 체포(1월). 징역 17년 선고

▲1913년=백정의 백과 범부의 범자를 따서 호를 백범으로 정함.

▲1914년=감형으로 형기 2년을 남기고 인천감옥 이감. 가석방(7월)

▲1919년=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경무국장 취임.

▲1932년=이봉창·윤봉길 의사 의거 지원. 자싱(가흥)으로 피난

▲1938년=남목청에서 열린 조선혁명당 한국독립당 한국국민당의 3당통합회의 석상에서 조선혁명당 당원 이운한에 피습

▲1939년=임시정부 중칭(중경)으로 옮김

▲1940년=임시정부 주석 선출. 광복군 조직

▲1945년=환국(11.23). 반탁운동 전개

▲1947년=「단정수립 반대」담화 발표

▲1948년=남북협상 참가차 평양 도착. 협상시작(4.30). 귀경후 남북협상결과 공동성명 발표(5.5)

▲1949년 6월26일=경교장서 안두희에 피습돼 절명(향년 7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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