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 위에 남편없고 부모 밑에 자녀없다”/부부도 아이들도 ‘존대말보다 반말로’/맞벌이 증가로 남편의 부엌일 일상화/여성경제권 독립 시댁·친정 똑같이 챙겨30대는 가정에서도 변화하고 있다. 이전세대 가정의 특징이 「가장의 권위」라고 말할 수 있다면 30대 가정의 모습은 「가족의 평등」쪽에 가깝다. 30대 아버지는 자녀에게 더 이상 엄부가 아니며 30대 남편은 아내와 그리 유별하지도 않다. 물론 가족의 평등화가 30대 가정의 일반적인 특징이라는 것은 아니다. 권위주의와 민주주의를 다같이 경험한 30대들이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이중적 가치관과 불충분한 사회적 여건은 가정내의 평등을 실현하는데 여전히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하지만 30대가 권위의 퇴조와 평등의 싹틈이라는 새로운 가정의 가치관을 받아들이는 최일선에 서 있는 세대라는 것만은 분명한 것같다.
지난해 발간돼 화제를 일으켰던 「새로 쓰는 결혼이야기」에 나온 30대 여성들의 결혼체험담은 이들 가정에서 일어나는 엄청난 변화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신모(37)씨 등은 『시어머니는 남편에게 존대말 쓰기를 요구했지만 이는 나에게 남편과 다른 관계로 들어가라는 의미로 여겨졌고, 더도 덜도 없이 굴욕적인 것으로 느껴졌다. 어머니에게 「저는 절대로 존대말 안하겠어요」라고 말했다』고 당당하게 쓰고 있다. 신씨 이외에도 30대 여성들은 「남편은 사회생활, 아내는 가사노동」이라는 획일적 분업구도에 비난을 퍼붓고 있다. 이들은 『사랑으로 포장된 부부간의 불평등을 감수하느니 결혼을 안하는 게 낫다』고까지 선언하고 있다.
가정에서 느껴지는 가장 큰 변화는 부부간의 호칭이다. 40, 50대 여성들은 결혼과 동시에 자기이름을 잃고 「여보」 「당신」이라는 호칭에 익숙해졌지만 30대에게는 그런 호칭이 생소하기만 하다. 이명순(33·K여중 교사)씨는 『대학시절 서클선배였던 남편을 결혼 후 7년이 지나도록 「형」이라고 부른다』며 『결혼 초 시어머니가 대경실색했지만 지금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고 말했다. 학창시절부터 연애해 결혼한 케이스일수록 아내가 「형」이란 호칭을 많이 쓴다. 서로 「씨」를 붙여 이름을 부르는 경우도 많다. 동갑내기는 물론 나이차가 제법나는 부부도 반말하는 것을 적잖이 볼 수 있다. 부부간의 반말이 흔한 풍경이 된 탓인지 30대 가정에서 부모에게 존대말을 쓰는 아이들을 찾아보기도 쉽지 않다.
호칭의 변화가 표면적인 것이라면 기혼여성의 경제권 독립은 부부관계 변화의 본질을 보여주고 있다. 김종수(32)씨 부부는 둘 다 은행원. 그들은 지난해 말 일산에 37평형 아파트를 마련하면서 공동명의로 재산등기를 했다. 아내만이 가계부를 적던 것도 옛말이다. 김씨는 『월급통장이 따로 있어 자연스럽게 개별적인 수입·지출관리가 이뤄지고 있다』며 『부모에 대한 선물과 용돈도 시댁과 친정 구분없이 똑같이 한다』고 말했다. 이들은 친지 등에 부의금 축의금을 낼 때도 반드시 두 사람의 이름을 함께 적을 만큼 일상의 평등을 실천하고 있다.
맞벌이가 늘어나면서 남편의 가사노동 참여도 늘어나고 있다. 물론 아내의 요구에 비해 남편의 참여는 여전히 낮지만 『남자가 무슨 부엌일을…』하던 이전 세대에 비하면 괄목할 일이다. 최근 송파구청이 개설한 「아버지 요리교실」에는 1백여명의 가장이 몰려 들었는데 넥타이차림의 30대가 30%이상을 차지했다. 요리교실에 참여한 박모(33·자영업)씨는 『어머니가 알면 야단을 치겠지만 직장일을 하는 아내를 위해 한두가지의 요리는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 뒤 『아내보다 시간여유가 많아 집안청소도 웬만하면 내가 한다』고 밝혔다. 박씨는 『딸아이를 놀이방에 데려가고 데려오는 일도 내가 하는데 엄마 대신 아빠손을 잡고 놀이방에 가는 아이들이 적지 않다』고 말했다. 역시 맞벌이인 윤원준(31)씨 부부는 윤씨가 취사병 출신이라 식사준비는 아예 자신이 도맡아 한다. 윤씨는 『파도 제대로 썰지 못하는 아내가 주방일을 하는 것보다는 내가 요리를 하는 게 훨씬 효율적』이라고 말했다.
남편위주로 이루어지던 부부동반모임이 아내쪽으로 바뀌고 있는 것도 새로운 현상. 오영선(31·주부)씨는 『대학친구들간의 친목모임이 결혼 후에는 부부동반모임으로 자연스럽게 변했다』며 『처음엔 어색해 하던 남편들이 서로 친해지고 나더니 부인들보다 더 좋아한다』고 말했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에서도 새로운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주체성을 거의 찾을 수 없었던 이전세대의 자녀들과 달리 30대를 부모로 둔 자녀의 「발언권」은 상대적으로 커졌다. TV채널권이나 외식메뉴·휴가지 선택권 등 과거 아버지의 전유물처럼 여겨졌던 각종 권한이 아내에게는 물론 자녀들에게까지 넘어가고 있다. 그래서 30대 가장들은 얼큰한 찌개맛을 멀리한채 휴일이면 피자집, 돈가스집, 켄터키치킨집을 찾고 있다. 회사원 김형선(38)씨는 『아이들이 원하는 곳에 가서 점심을 사준 뒤 우리 부부가 먹고싶은 음식점으로 자리를 옮기는 경우도 있다』며 『이것도 다 사는 재미』라고 말했다. 김씨의 말은 사실인 것같다. 많은 30대들이 이런 번거로움을 불편이라고 여기기보다는 행복의 연장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해졌다.
이런 흐름에 익숙하지 않은 30대 가장은 가끔씩 낭패를 당하기도 한다. 두 딸의 아빠인 유호준(34·회사원)씨는 지난해 첫 딸이 다니는 유치원에서 마련한 「아버지와 함께 하는 날」행사에 1시간 늦게 갔다가 얼굴이 화끈거리는 경험을 했다. 유씨는 『극성스런 아빠로 찍히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을 해가며 천천히 갔더니 18명의 아빠가 빠짐없이 나왔는데 나 혼자 지각을 했더라』고 말했다.
하지만 많은 여성학자들은 『극히 일부분을 제외하고는 30대가정 역시 남성의 전근대적인 사고방식과 행동으로 가부장적 틀을 깨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들은 대표적 사례로 맞벌이부부의 경우에도 여성은 여전히 가사와 육아의 대부분을 책임지는 반면 남성은 「도와주기」가 고작이라고 말한다.
전문가들은 또 『30대는 가부장적인 부모의 굴레는 많이 벗었으나 도가 지나쳐 아이들의 방종을 조장하는 측면도 없지 않다』고 지적한다. 그들은 『부모가 자녀들이 식당에서 떠들어도 그냥 놔두기 일쑤』라며 『기본적인 공중도덕도 가르치지 않는 것이 자녀사랑의 참모습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여성학자인 손승영(42·연세대 사회발전연구소 전문연구원) 박사는 『30대 가정의 평등화는 아직 초보적 수준』이라며 『부부간의 반말같은 피상적 변화보다 대화와 토론이 통하는 가정 내의 진정한 민주주의가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이동국 기자>이동국>
◎‘반쪽이’ 부부 최정현변재란씨/“육아는 남편이 요리는 아내가”/생활비 따로따로 가사분담도 철저/그러나 부모세대와 갈등은 여전
만화 「반쪽이」의 작가 최정현(37)씨와 그의 아내인 영화평론가 변재란(36·여)씨는 30대 평등부부의 전형이다. 생활비 부담에 부부별산제를 도입, 서로 「딴 주머니」를 차고 산다. 그래서 상대방 월수입이 얼마인지, 서로의 재산이 얼마인지도 모른채 살아간다. 이들은 가사분담에도 소홀함이 없다. 시장보기와 요리를 아내가 맡고 남편은 청소와 설거지를 담당한다.
남편 최씨는 『맞벌이 부부라면 가사분담은 당연한 일』이라며 『결혼 초에는 가사분담문제로 아내와 갈등도 겪었지만 그 과정에서 결국 조율된 합의점을 찾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최씨가 분담하는 가장 큰 가사는 딸 하예린(7)의 가정교육. 결혼한지 10년째 접어드는 부부에게는 「하늘에서 내린 예쁜이」라는 딸 하예린양의 교육이 가장 큰 문제였다. 딸이 유치원에서 돌아와도 함께 놀 친구가 없었다. 또래의 친구들은 2∼3개씩 학원을 다니느라 모두 집을 비우기 때문이다. 학원을 다니지 않는 하예린양은 그래서 자기보다 나이가 2∼3세 어린 꼬마들과 어울릴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주로 집에서 일하는 최씨가 딸의 친구와 선생님이 되기로 했다.
최씨부부 사이에도 갈등은 있다. 특히 명절때 가족들이 모이게 되면 자상하고 친구같던 남편도 어쩔 수 없는 「권위적 가장」으로, 아내는 어김없는 「부엌데기 며느리」로 변하는 것이다.
변씨는 『30대 부부는 과도기세대』라며 『학창시절 몸에 배었던 「민주방식」대로 가정의 평등을 실천해 보려 하지만 선배나 부모들의 세대도 이해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진정한 평등부부로 살아가는 전제에 대해 『남편이 돈과 명예의 부담에서, 부인과 자식의 멍에에서 해방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김정곤 기자>김정곤>
◎30대 가정과 핵가족/전체가구중 30% 차지/아이도 대부분 1∼2명
30대 가정의 평등화는 핵가족화 추세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대가족제도의 해체는 할아버지―아버지―손자로 이어지는 가정내 위계질서를 무너뜨리고 부부간, 부모와 자식간의 수평적 평등을 이루는데 기여하고 있다.
통계청자료에 따르면 94년 현재 우리나라의 전체가구수는 1,296만1,138가구이며 이중 30대 가구주수는 392만1,699가구로 가장 높은 비율(30.26%)을 차지하고 있다. 이는 30대가 베이비붐세대로 인구층이 두터운데다 30대 이후 결혼하는 만혼의 증가와도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인구억제정책의 성공에 힘입어 자녀수 또한 한명 또는 두명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연도별 출생아 중 첫째와 둘째의 비율은 75년 25%, 21.8%에서 꾸준히 증가, 94년에는 49.7%, 42.1%로 늘어났다. 이에 비해 세째와 네째이상의 비율은 75년 18.8%, 34.4%에서 94년 7.1%, 1.1%에 그쳤다.<김정곤 기자>김정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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