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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과 대통령(지평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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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과 대통령(지평선)

입력
1997.02.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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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제군주 시대에는 왕이 뭇사람의 생사여탈권까지 가졌었다. 그러나 왕도 못하는 일이 있었다. 도리에 맞지않는 일을 못하는 것이 법도였다.역사에는 「양사의 관원들이 벌떼처럼 일어났다」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 왕에게 그런 제약이 많았음을 증명하는 말이다. 어떤 일을 도리에 어긋나게 처결했거나 하려 할 때 사헌부와 사간원 관리들이 일제히 들고 일어나 왕의 잘못을 지적하고 광정을 직소한 것이다.

사헌부란 관리들의 기강을 바로잡고 풍속의 문란을 감시해 백성이 억울하게 피해 보는 일이 없도록 하는 일을 맡았던 사정기관. 오늘의 검찰에 해당한다. 사간원은 간쟁과 논박의 일을 관장하는 기관이었다. 두 사정기관 관리들이 왕의 잘못까지 직간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한 권한이 있었기 때문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양사의 추상같은 사정실례는 얼마든지 있다. 개혁을 말할 때마다 떠올리는 조광조의 일화가 대표적이다. 중종때 사간원 정언(정6품) 자리에 가게 된 그는 직속상관인 대사간과 대사헌의 파직을 직언하는 일로 개혁의 기치를 세웠다. 37세에 사헌부의 우두머리 대사헌이 된 그는 비빈들의 횡포의 근원인 소격서를 혁파하는 등 단기간에 눈부신 개혁성과를 거두었다.

가사문학의 큰별 송강 정철은 사헌부 지평(정5품)때 명종의 사촌형을 사형에 처했다. 경양군이 처남을 죽이고 처가의 재산을 빼앗은 사건을 그가 맡게 되자 명종은 사촌형을 관대히 처분하도록 밀지를 내렸다. 그러나 대쪽같은 송강은 극형으로 처리하고 말았다.

대통령 아들의 문제로 온 나라가 시끄럽다. 대통령의 사과에도 불구하고 민심은 좀처럼 가라앉을 기미가 안 보인다. 전제군주시대에도 비빈들과 왕족의 월권을 단속하는 사정의 기율이 그러했는데, 국민이 주인이라는 나라에서 대통령 아들의 비리관련설 진상을 가리기조차 이렇게 어려우니 지금 우리는 어떤 시대를 살고 있는 걸까. 입버릇처럼 되뇌는 개혁이란 과연 무엇인가.<논설위원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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