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산·분당·평촌·중동…/앙상했던 골격에 살이 올라 더이상 베드타운이 아니다/주민들 대부분이 30,40대 전문·사무직/대형 할인매장·야간쇼핑 주말엔 가족끼리 외출/이웃과 함께 소풍·휴가/문화시설 부족 말고는 살만하다는데/과연 ‘꿈의 전원도시’로 자리매김 할 수 있을지「꿈의 전원도시」. 80년대 말엽, 6공 정부가 신도시 개발계획을 발표하면서 약속한 이 장밋빛 미래가 끔찍한 현실로 뒤바뀌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완공 직후부터 터져나오기 시작한 부실시공 문제, 교통난, 교육난, 편의시설 부족 등…. 신도시는 총제적 부실의 전시장임이 드러났고, 힘들여 마련한 내 집을 버리고 서울로 역류하는 사람들마저 생겨났다. 「신도시가 아니라 쉰도시」라는 자조어린 비아냥이 떠돌 정도였다.
『그때는 참 힘들고 마음 고생도 심했어요. 경기를 일으킨 아이를 진찰할 병원이 없어 새벽에 서울까지 와야했던 적도 있었어요. 그때 비하면 지금은 참으로 살 만해진 셈이지요. 가능한 여기 오래 살려고 해요』 일산 신도시 백석마을에 사는 주부 김경란(34)씨의 이야기다.
생각을 바꾼 것은 김씨뿐만이 아니다. 일산구청이 자체조사한 96년 주민만족도 조사결과에 따르면 「계속 살겠다」고 응답한 사람은 62%. 현재 살고있는 주택에 대한 만족도는 「보통이다」 46.3%를 포함해 긍정적 평가가 87.7%였다.
일산 뿐이 아니다. 분당, 평촌, 산본, 중동 등 신도시촌은 더이상 서울의 「베드타운」이 아니다. 잠시 머무는 도시, 서울에 아파트를 장만하기 위한 중간 재테크 과정으로 잠시 거쳐가는 도시가 아니라, 명실상부한 생활의 터전으로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이다. 큰 공사가 마무리되고, 각종 편의시설이 확충되는 등 골격만 앙상했던 신도시에 살이 붙으면서 주민들의 생활의 질이 높아진 결과이다.
이렇게 신도시 붙박이들이 늘어난 것에 비례하여 「신도시 문화」라고 할만한 신도시 특유의 라이프 스타일 또는 문화적 풍경이 자리잡아가고 있다. 「신도시 문화」는 30, 40대, 고학력, 사무직·전문직 직장인들이 주민의 대부분이라는 점에서 「신중산층 문화」이다. 거기에 지역적 특성을 갖고 나름의 독자적인 모습을 만들어가고 있다.
지난 22일 토요일 하오 일산에 있는 대형 할인매장 E-마트. 계산대마다 사람들로 북적대지만 서울의 모습과 다른 점은 가족 단위 쇼핑객들이 유독 많이 눈에 띈다는 것이다. 물건 싣는 카트에 아이들을 태우고 한가롭게 어슬렁거리는 가족의 모습은 신도시에서는 익숙한 주말 풍경이다. 그날 그날 필요에 맞춰 구매하는 것이 아니라 며칠분을 미리 계획해 사들이는 「목적 구매」 고객들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E―마트 직원 박장대씨는 『벌크(무포장, 대량 판매) 구매고객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매일 장 볼 형편이 못되는 맞벌이 부부들이 많아서일 것』이라고 분석한다. 야간쇼핑도 신도시만의 풍경이다.
최근 신도시에서는 E-마트, 킴스클럽 등의 국내 자본 말고도 까르푸, 마크로 등의 외국계 대형 할인매장들이 기존 재래상권을 급속히 잠식하며 성업중이다. 『서울에서는 아직도 백화점, 재래시장이 소비의 중심이라면 이곳 신도시는 백화점, 할인매장이 주역이다. 포장이나 유행보다는 가격과 실속을 따지는 신도시 주민들의 합리적인 소비성향이 반영된 것 같다』 네덜란드계 할인전문점 마크로 배정수(마케팅 팀장)씨의 말이다.
신도시에서는 소비뿐 아니라 외식·여가·레저 생활 등의 라이프 스타일 전반이 가족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신도시는 여자들에게는 천국, 남자들에게는 지옥이라는 농담도 있습니다. 주말 낮잠은 꿈도 못꾸는 분위기지요. 하다못해 점심 한 끼라도 가족과 외식을 해야한다는 게 이곳 가정들의 불문율처럼 돼 있습니다』 여의도에 직장을 두고있는 분당신도시 주민 김기석(37)씨의 푸념 아닌 푸념이다.
핵가족 중심 가족주의 문화가 이곳 신도시 지역에서는 이미 일반화하고 있는 것이다. 분당이나 일산 등 신도시에서는 비디오 가게가 잘 안된다는 말도 있다. 신도시 주민들은 안방에 누에고치처럼 처박혀 주말을 지내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가족중심문화가 「가족 이기주의」로 흐르기보다는 보다 성숙한 「신공동체 문화」의 싹을 엿보게 한다는 점이다. 「이웃관계」를 신도시에 거주하면서 가장 만족스런 점(46.0%)이라고 응답한 일산구청 주민 만족도 조사결과는 서울 강남 등의 대단위 아파트 지역과는 뚜렷하게 구별되는 신도시만의 특성을 잘 보여준다.
『여름이면 삼삼오오 모여앉아 맥주 따위를 마시면서 친교를 나누는 정겨운 저녁 풍경이 연출되곤 합니다. 휴가나 소풍을 몇 가족이 어울려 가는 것은 물론이고, 공동 육아까지도 이곳에서는 드문 일이 아닙니다』 분당에 정착한 지 2년째인 김민식(32·회사원)씨의 말이다. 먼저 신도시에 입주한 사람이 친지나 가까운 친구들을 불러모아 일종의 「집단 거주」를 이루는 것도 신도시만의 새로운 풍속도다. 친구나 직장동료끼리 단독주택을 공동설계해 아래 윗층에 사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문인들이 유독 일산에 많은 것도 먼저 들어온 사람들을 중심으로 입소문이 퍼진 덕분이다. 서울에 사는 것보다 신도시에 살면서 이들은 더욱 자주 만나 교류한다. 신백마촌에 있는 카페 「시인학교」에서는 다음주중 150여명에 이르는 문인들을 초청하여 조촐한 술자리를 준비하고 있기도 하다. 지리적 요인도 있지만 분당에는 변호사 판·검사 등 법조인이 많이 산다.
그러나 신도시가 고유한 문화적 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아직 해결해야 할 과제도 많다. 서울에 직장을 두고있는 인구가 여전히 70%를 훨씬 상회하고 있는 상황에서 지역 단위의 문화가 꽃피기는 어차피 어렵지 않겠냐는 지적이다. 쇼핑과 외식, 레저생활 등에서는 만족스럽다 하더라도 문화적 기능이 취약한 편이다. 극장이나 영화관은 물론이고 전시공간, 종합 문화시설 등이 신도시의 규모에 전혀 미치지 못한다.
신도시는 과거 공화국의 공약처럼 「꿈의 전원도시」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거대 서울의 변두리 타운으로 전락하고 말 것인가? 이는 비단 신도시 주민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적어도 아직까지 신도시는 거대 서울의 제반 문제를 해결할 거의 유일한 대안이자, 실험이며 모델이기 때문이다.<황동일 기자>황동일>
◎활발한 시민운동/나이·벌이 비슷 요구도 많고 잘 뭉쳐/교통·공공시설 등 굵직굵직한 민원도 거뜬히 해결
꽉 닫힌 철문, 못질이라도 한 번 할라치면 관리실에 항의전화를 하는 아랫층 사람,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는 삭막한 인심. 그러나 신도시 아파트촌은 조금 다르다. 대도시에 비해 잘 뭉치고 적극적이다. 허허벌판에 하나의 도시를 만들었다는 공동체의식이 남다르기 때문인지.
신도시 주민들은 대도시에 비해 젊고 고학력이다. 일산의 경우 30, 40대가 50%이며 전문대졸 이상이 40%이다. 이들은 새로 아파트를 장만하거나 더 큰 평수로 이사온 중산층들이 대부분으로 정치의식과 사회참여도가 높다.
그래서 주민들의 요구도 많고 단체활동도 활발하다. 『나이또래나 벌이가 비슷합니다. 얘기가 통하는 사람들이 많아 가족끼리 자주 왕래하는 편이죠. 어떻게든 좀더 편리한 시설에 문화 생활도 누리면서 살고자 하는 욕심이 많더군요』 출판사에 다니는 일산 강촌마을 허철웅(35)씨의 말이다.
시민운동이 가장 활발한 곳은 일산. 지난 해 3월 1일 전국에서 처음으로 일산구청은 생활민원계가 아닌 생활민원과를 설치했다. 연말까지 모두 3,142건의 민원을 처리했는데, 자잘한 화장실 하자 보수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주민 생활 불편사항을 처리해주고 있다. 지난 해 12월에는 흰돌마을 606동 주민들이 소음과 주차 문제를 들어 E-마트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 승소했다.
가장 입김이 센 단체는 자치조직인 입주자 대표회의. 94년 7월에 발족한 이 조직은 과다하게 책정된 건물분 재산세 인하건과 조용한 도시를 만들기 위한 일산 상공의 항로 이동건 등 굵직굵직한 민원사업을 해결했다. 한편 순수 시민운동 단체인 고양시민회는 95년 5월부터 입석버스증차문제, 택시요금 합리적 조정 등에 대해 서명운동을 벌여 택시요금 미터제를 정착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다.
교통과 공공시설만이 이들의 관심사는 아니다. 시민운동단체들은 신도시 나름의 독특한 문화적 기반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고양시민회가 지난해부터 1,700여 평의 밭을 마련, 운영하는 주말농장에는 70여 가구가 참여하고 있다. 또 열린 고양 지역자치연구소가 개설한 「열린 문화학교」에는 현재 150여 명의 어린이와 학부모들이 탈춤 등을 배우고 있다, 이밖에 참교육을 위한 학부모회의도 지역문화기행, 학부모 권리찾기 등의 활동을 하고 있다.
성남 분당, 부천 중동, 안양 평촌, 군포 산본 등의 신도시에서도 아파트 자치회 등을 통한 주민들의 활동이 활발하다. 구도시와는 비교적 독립적인 분당 주민들은 도시의 자족기능을 위한 기반 시설을 확충하는 것이 가장 큰 바람이며, 이미 자족기능을 갖춘 구도시에 건설된 중동 평촌 산본 주민들에게는 아파트촌의 안전과 환경문제가 가장 큰 요구이다.
고양시민회 최창의 회장은 『신도시의 독특한 문화를 만드는 것이 숙제입니다. 토착적인 전통문화에 대도시의 문화가 결합된 신도시적인 신선한 문화를 만들어나갈 것입니다』라고 말했다.<유병률 기자>유병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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