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 대통령이 대국민담화를 발표한 어제는 나라 전체가 우울한 날이었다. 아니 침통하고 참담한 날이었다. 대통령이 취임 4주년을 맞아 이른바 개혁과 변화를 통한 신한국건설에 관한 업적을 자랑해야하는 날에 실정과 국정운영의 난맥에 대해 사과하게 된 것은 국가적으로 불행한 일이었다. 담화를 지켜보는 국민 역시 허탈감을 지울 수가 없었다.한보사건은 단순한 금융사고나 비리가 아니었다. 이 정부가 출범초 높은 도덕성을 강조하며 내세웠던 부정부패척결, 경제회생과 국가기강확립 등 3대 개혁과제를 송두리째 부정하고 뒤집은 사건이었다. 그래서 충격과 파장이 컸었다. 국민의 가슴을 만신창이로 만들고 나라를 크게 멍들게 한 것이다. 따라서 국정의 최고책임자인 김대통령이 국민에게 사과한 것은 뒤늦은 감은 있지만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했다는 점에서 그 추이를 지켜보고자 한다. 물론 김대통령으로서는 취임후 처음 갖는 사과여서 참기 힘든 결심이었겠지만 참담하기론 그것을 듣는 국민도 같은 심정이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흔히 개혁은 총칼로 하는 혁명보다 더 어렵다는 얘기를 한다. 개혁을 하기 위해서는 확고한 철학과 실천계획이 있어야 하고 국민의 이해와 협력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김대통령은 지난 4년간 민주화와 문민정부를 무슨 특권이나 만병통치약처럼 내세우며 무조건 따라오라는 식의 독선과 독주로 일관했다. 또 비판마저 허용하지 않는 오만한 자세로 인해 민심은 멀어져 갔고 측근에서는 갖가지 비리와 부패가 독버섯처럼 뿌리를 내렸다.
이번에 김대통령이 포괄적인 사과는 했지만 한보사건처리 방향에 대해선 모호한 것이 너무나 많다. 국민이 이 사건에 고대했던 것은 속시원한 진상규명이었다. 김대통령은 그런 의미에서 검찰의 재수사내지 엄정한 계속 수사와 함께 국회 국조특위가 국민적 차원에서 진실을 파헤칠 수 있도록 모든 협조를 할 것을 약속했어야 했다.
이날 김대통령이 아들 현철씨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한 아버지로서의 비통한 심경고백은 이해할 만하다. 오랫동안 말썽이 돼왔던 대통령의 친인척관리가 얼마나 어려운 일임을 다시 보여준 것이라 하겠다. 때문에 현철씨로 하여금 모든 사회활동을 중지케 하고 가까이 두지 않겠다고 한 것은 취임후 갖가지 인사와 국정운영에 개입했다는 의혹에 찬 시선을 원천차단하겠다는 뜻으로 봐야할 것이다. 김대통령으로서는 아들 문제에 관해 괴로운 결단을 내린 셈이지만 얼마나 실질적인 차단이 이뤄질 것인지는 그야말로 지켜볼 일이다.
이날 김대통령은 취임초의 각오로 돌아가 나머지 임기 1년동안 부정부패척결과 경제회생, 안보태세강화 및 오는 대통령선거의 공정한 관리 등의 의지를 표명했다. 이런 의지표명이 지난 4년의 전철을 밟아선 안될 것이다. 어떠한 새로운 조치나 결정보다는 이미 착수한 개혁을 보완·추진하는 일에 역점을 둬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앞으로 단행할 요직개편은 이같은 4대 과제의 성실한 이행여부를 판가름하는 시금석이 될 것이다. 이른바 지연 학연에 의한 편중인사, 직계위주의 잘못된 인사를 되풀이해서는 안된다. 청와대 보좌진, 내각, 당을 능력있는 새 인물로 대폭 교체함으로써 뒤늦게나마 만사다운 바른 인사를 보여줘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가신의 장막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경제회생은 국가발전을 좌우하는 제1의 긴급과제다. 정부는 이제 중심을 잡고 경제회생의 확고한 의지와 방책을 세워 국민을 안심시키고 또 의욕을 갖게하는 것이 시급하다. 검은 돈의 차단을 위한 정치자금법 손질은 단 한가지면 충분하다. 단돈 만원이라도 정치인에게 직접 건넬 때 주는 쪽 받는 쪽 모두 엄벌하는 처벌규정을 삽입하면 된다. 그렇게 해서 말도 안되는 황당한 「떡값」 얘기가 나오지 못하게 해야한다.
김대통령의 담화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여당의 대통령 후보를 자유롭고 민주적이고 공정한 경선과정으로 뽑을 것이며 당원의 뜻을 전적으로 존중하겠다는 공약이다. 연두기자회견에서 후보결정에 총재로서 간여,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듯한 권위주의적 자세에서 후퇴한 것이다. 민주적 자유 경선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지만 이를 실천할 경우 한국정치사상 하나의 업적으로 기록될 것이다. 이를 구현하기 위해 모든 지망자들의 참여와 선거운동을 허용하도록 당헌·당규를 개정해야 할 것이다.
앞으로 김대통령이 해야 할 과제들은 너무나 중요하다. 대대적인 인사개편과 함께 한보사건에 대한 의혹을 규명하는 한편 담화에서 밝힌 공약들을 실천해야 한다. 국민은 김대통령이 지금까지 독점했던 모든 권한과 권력을 내각과 당·국회에 돌려주고 성실한 자세로 약속들을 하나하나 실천하기를 기대하고 있다. 특히 어떤 질책과 비판도 듣겠다는 자세를 주목하고 있다.
그렇게 해서 집권초기 국민을 감동케 했던 재산공개, 군의 탈정치화, 실명제실시, 지방자치정착 등의 개혁 업적들이 더욱 뿌리내리기를 갈망하고 있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다. 더 이상 시간이 없다. 모든 것은 김대통령의 실천의지와 포용하는 자세에 달려 있다. 그런 다음 겸허하게 역사의 심판과 평가를 기다려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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