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전, 큰아이가 유치원에 다닐 때였다. 저녁에 유치원 선생님이 1,000원짜리 아홉 장을 들고 집에 찾아왔다. 유치원 근처 가게집 아주머니가 우리 아이가 거스름돈을 가져가지 않았다며 맡겼다는 것이다. 만원짜리를 내고 친구와 과자를 하나씩 사갔다는데 그렇게 큰 돈이 대체 어디서 나왔을까. 선생님이 돌아간 다음 아이를 불러 물었다.처음에는 사촌언니방 침대 밑에서 주웠다고 했다. 사촌언니가 만원짜리는 있지도 않았다고 하자 아이는 길에서 주웠다고 말을 바꿨다. 아이가 너무 주눅이 든 것 같아서 나는 돈을 주우면 어른에게 먼저 알려야 한다고 타이르고 마무리했다. 그런데 그건 거짓말이었다. 아침에 내게 받은 생활비에서 만원이 비더라는 어머니의 귀띔에 되짚어보니 생활비를 책상위에 올려뒀었다. 천진한 얼굴을 하고 내 눈을 똑바로 보면서 끝까지 길에서 주웠다고 우겨대는 데 절망감이 느껴졌다. 내가 사실을 들이대서야 고개를 끄덕이는 아이를 붙잡고 나는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다. 이래서는 안되는데 하면서도 몇 대 때리고야 말았다. 「될성부른 나무 떡잎부터 안다는데 이 아이가 제대로 클까」하는 생각에 아이를 내보내고 나도 울었다.
2년쯤 지나고 나니, 아이는 그 일을 스스로 이야기 하곤 했다. 『엄마, 내가 엄마돈 만원 훔쳐가지고 까먹었을 때 말야』 천진한 표정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걸 보고 아이에게 그 일은 부끄러운 잘못이 아니라 어린시절 추억의 한 페이지인 것을 깨달았다. 냉정히 생각하면 거짓말에 대해 어른의 시각으로 확대해석한 데다 남편없이 아이를 키운다는 자격지심이 더해져서 내가 과민반응을 보였던 것 같다. 흥분한 내가 만들어낸 공포분위기가 아이에게 사실대로 말할 용기를 허락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제야 들었다.
그 이후 나는 아이가 잘못했을 때 당장 대응하지 않으려 한다. 당장은 큰 일 같아 놀랐어도 시간이 지나고 나면 별일 아닌 것도 적지않다. 자식문제에 객관성을 가지기란 어려운 일이기에 냉각기가 꼭 있어야 하는 것이다. 순간순간 참을 인자를 새기면서 부모노릇의 어려움과 재미를 느껴간다.<여성학자>여성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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