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전 대학 졸업예정자 모임에서 있었던 일이다. 『요즘 세상이 제 아무리 썩어문드러졌어도 젊은이들은 정직하고 올바르고 맑고 깨끗하게 살아야 한다』고 외쳤다. 그랬더니 일제히 일어나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아가자> 는 노래를 불러주어 울적하던 참에 그리 눈물겨울 수가 없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어느 젊은이가 항변했다.『선생님, 무슨 소릴 하십니까. 정직하게 살면 굶어 죽게 되어 있습니다』 올바르게 살고자 하면 판판이 실패하고, 깨끗하게 살고자 하면 고립되어 죽는다는 것을 알고나 하시는 소리냐는 것이다. 사랑도>
하긴 한보사태만 해도 그렇다. 한 부패재벌에게 6조원에 가까운 금융지원을 한 실세라면 권력의 핵심, 김영삼 대통령을 빼놓고는 불가능하다는 것이 여론이다. 이러니 그 젊은이의 말을 어찌 탓하랴.
그래서 나는 조용히 속삭일 수 밖에 없었다. 『여보게, 자네 말이 맞네. 하지만 자네는 어찌보면 심정적 패배주의자라네. 탁류의 저 밑바닥에 흐르는 양심의 물살이 얼마나 거센 줄 아는가. 그러니 아무리 절망스럽더라도 우리는 정직을 생명으로, 옳음을 원칙으로, 맑음을 보람으로 살자』고 입술을 깨물었다.
바야흐로 젊은이들이 학업을 마치고 세상의 새내기로 나서는 벅찬 봄이 다가왔다. 그런데 걱정이 앞선다. 무엇 때문일까? 물론 비좁은 취업문을 걱정해서 모두가 일자리를 갖게 됐으면 좋겠다. 그러나 나는 그들에게 취업문제만 들먹이는 세태를 옳지않게 생각한다. 도리어 그들에게 몰아닥칠 주관적 패배주의가 더 문제라고 생각한다. 가령 지금 세계적 풍조의 특징은 무엇일까.
「정의의 역사는 패배했다」는 역사에 대한 주관주의적 부정이다. 그 논리적 연역으로 지금 우리 사회는 옳은 일은 해봐야 안되더라는 풍조가 있다. 한 개인의 좌절을 역사의 좌절로 바꿔치기하는 파렴치한 주관의 반란이다.
이리하여 세상에 나온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학생 때 가졌던 꿈과 이상을 발전시키려는 노력 따위는 금세 포기하고 아파트를 15평에서 20평, 20평에서 30평으로 늘릴 생각과 새 자동차 바꾸기나 걱정하는 파리한 현실추수주의자가 되어가는 풍조가 더 문제라는 것이다.
두번째는 젊은이들이 자칫 빠지기 쉬운 속물주의가 문제이다.
지금은 무한경쟁 시대라고 한다. 그러나 알고 보면 그것은 독점자본의 자기증식논리이지 사람의 본질, 창조, 노동에 적용될 보편적 진리는 아닌 것이다. 그런데도 그 논리에 현혹돼 이상을 잃고 야망의 포로가 되어가고 있는 현상이 그리 가슴 아플 수가 없다. 이리하여 운동장에선 환호가 있으되 감격은 없고, 뒷골목 술집은 시끌벅적하되 자기상실의 자조마저 병들어가고, 너도나도 높은 수입과 출세, 명예, 안정을 요구하는 현상이 병균처럼 만연하고 있다고 한다면 이를 부인할 사람이 있을까.
그렇다. 오늘 이 모진 세상에 첫발을 내딛는 새내기들에게 도전해 오는 것이 실업의 위기만은 아니다. 바로 이 속물주의인 것이니 이를 슬기롭게 극복해야 한다. 그렇다. 옛부터 우리 조상들은 현실에 주저앉는 자를 멱줄, 즉 숨통을 죽이는 살인자라고 했고, 현실의 질곡을 깨고 사랑과 꿈을 찾아 한없이 개척해가는 대륙적 인간을 「저치」라 했다. 그래서 시집장가간다는 말보다는 「저치간다」는 말을 더 좋아했다. 그러니 오늘의 젊은이들이여, 주저앉아 엉덩이가 썩어나게 뭉갤 것인가, 앞으로 나아갈 것인가.
나이테만 젊다고 다 젊은이는 아니다.
참된 젊은이라면 첫째 눈을 열고, 둘째 꿈을 회복하고, 셋째 속임수 악덕은 일시적으로 성취할 수는 있어도 결코 승리하지 못한다는 역사의식과 최후의 승리는 양심의 것이라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아, 이 이른봄 새내기들이 미린내(은하수)처럼 쏟아져 나온다. 그들로 하여 정직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으면 하는 것이 졸업을 축하하는 내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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