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표현한 인간존재의 비극성김춘수는 아마도 한국현대시사에서 시장르에 관한 언어적 자의식이 가장 집요했던 시인의 하나로 기억될 것이다. 아니 기억된다는 표현은 아직 그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 시언어의 한계지점까지 나아가려는 그의 모험은 아직 종결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는데, 최근에 나온 시집 「들림, 도스토예프스키」는 그것을 입증한다.
이 시집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들에서 모티프를 가져왔다. 도스토예프스키를 읽고 「들렸던」 시인의 경험은 한권의 시집을 탄생시킨 것이다. 소설의 모티프를 시적으로 변용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닌데, 도스토예프스키의 인물들과 장면들을 이미지화함으로써 시인은 이를 실행한다.
시인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작중 인물들끼리 대화를 시키고 독백도 하게 만든다. 라스코리니코프는 소냐에게 <천사는 온몸이 눈인데 온몸으로 나를 보는 네가 바로 천사> 라고 말하고 <시방도 어디서 온몸으로 나를 보는 내 눈인 너> 라고 사랑을 표현하도록 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 시집 전체를 시적 대사만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극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시방도> 천사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에 대한 선이해가 부족한 독자들에게 이 시집의 인물들은 좀 낯설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인의 특유한 이미지 조형 능력은 여전히 눈부시며, 그 눈부심을 경험할 준비가 된 독자라면 이 시집을 읽을 수 있다.
시인이 도스토예프스키의 인물들에게 애정을 갖는 이유는 그들이 인간존재의 모순을 체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인이 후기에서 밝힌 바 대로 <인간존재의 비극성은 역사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계시> 가 여기에 숨어있다. 인간존재의>
어쩌면 김춘수가 자기 생애의 불우를 통해 역사의 악한 의지만을 보았다는 것은 그의 불행이면서 동시에 우리 현대사와 현대시사의 불행일지도 모른다.
사실 한국현대사의 파행적인 시간들은 김춘수의 시를 시로서 읽게 하는데 많은 장애를 부과했다. 한국현대시사에서 김춘수의 신화는 억압되어왔거나 은폐되어왔다. 그토록 수많은 시인들이 그에게서 시를 시작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하지만 그는 시인의 불행을 시를 통해 철저히 살아냈으며 그것을 인간존재의 보편적인 모순과 비극성으로 받아들였다. 우리는 그 불행과 언어의 층위에서 대결한 그의 40여년의 고투를 보았으며, 그것이 그의 이름을 문학사에서 결코 지울 수 없는 이유이다.<이광호 서울예전 교수·문학평론가>이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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