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붕 총리/‘천안문’ 유혈진압 주도 보수파리펑(이붕·69) 중국총리는 88년 자오쯔양(조자양)의 후임으로 국무원총리에 선출된 뒤 93년 3월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에서 5년 임기의 총리에 연임됐다.
28년 쓰촨(사천)성 청두(성도)에서 출생한 그는 공산당원이었던 부친 리숴쉰(이석훈)이 국민당군에 피살된 후 저우언라이(주은래)의 양자로 들어가 옌안(연안)자연과학원, 모스크바 동력학교 등에서 수학했다. 45년 공산당에 입당한 그는 수력발전부문에서 근무하다 79년 전력공업부 부부장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이후 권력엘리트로 자리를 굳힌 그는 83년 부총리, 85년 정치국원에 선출됐으며 87년 정치국 상무위원에 발탁되는 등 빠른 속도로 승진을 거듭했다.
천안문사태때 유혈진압을 주도, 강성보수파라는 비난도 받았지만 전형적인 외유내강형이다. 러시아어와 영어를 구사하며 컴퓨터조작까지 능숙하다.
◎유화청 군사위 부주석/강택민 보위 군부의 최고실세
류화칭(유화청·81)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 제1부주석 겸 정치국 상무위원은 군경력이 전무한 장쩌민(강택민) 국가주석의 약점을 보완해 주는 군부의 최고 실세. 82년 해군사령관, 87년 중앙군사위 부비서장을 거쳐 강이 총서기 겸 군사위 주석으로 선출된 89년 13기 4중전회에서 부주석에 발탁됐다.
유는 89년 천안문사태후 군부를 장악한 양상쿤(양상곤)―양바이빙(양백)형제를 견제하고 강주석에게 힘을 실어 주려는 덩샤오핑(등소평)의 의도에 따라 92년 10월 군사위 제1부주석에 올랐다. 후베이(호북)성 다우(대오)현 출신으로 31년 군생활을 시작한 유는 37년 팔로군 129사단 선전주임으로 임명되면서 당시 정치국원이었던 등의 심복역할을 했다. 천안문사태 당시 군의 시위진압에 반대, 국민으로부터 신망을 얻었다.
◎주용기 부총리/상해파로 경제개혁의 기수
주룽지(주용기·67) 부총리는 「중국의 고르바초프」로 불리는 경제개혁의 기수. 92년 10월 당중앙 정치국 상무위원에 선출된 주는 중앙은행인 인민은행장을 거쳐 93년 11월 제14기 3중전회에서 리펑(이붕) 총리로부터 경제분야 업무를 넘겨받아 중국경제 총책임자로 등장했다.
28년 마오쩌둥(모택동)의 고향인 후난(호남)성 장쓰(장사)에서 태어난 주는 51년에 칭화(청화)대 전기공학과를 졸업한 뒤 사회과학원 공업경제연구소 주임 등을 거쳐 87년 상하이(상해)시 당서기로, 이듬해에는 상하이시장에 임명됐다.
그는 당시 상하이를 세계교역의 중심지로 만들겠다는 의욕적인 푸둥(포동)개발계획의 수립을 주도, 등의 눈에 들어 91년 4월 부총리에 발탁됐다.<베이징=송대수 특파원>베이징=송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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