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고한 체제기반 상당기간 지속될듯/권력투쟁땐 이붕·교석이 유력경쟁자덩샤오핑(등소평)이 사라짐으로써 중국 권력구조에 커다란 공백이 생겼다. 이 공백은 아무나 채울 수 없을 정도로 너무 크기 때문에 향후 중국 정국이 안개국면속으로 빠져들어갈 가능성이 적지않다.
등이 생전에 설계·구축한 후계체제는 장쩌민(강택민) 국가주석―리펑(이붕) 총리로 이어지는 「강―이 라인」이다. 이같은 의도에 따라 강이 명실상부한 최고 권력자의 위치를 유지할 것인지, 이총리가 2인자 위치를 계속 감수할 것인지 등등의 물음도 제기될 수 있다.
우선 향후 강의 입지와 관련, 마오쩌둥(모택동) 사후 과도기적 지도자로 단명한 화궈펑(화국봉)이 연상된다. 등이 강을 후계자로 선택할 당시의 정치상황은 모가 화를 간택했을 때의 정황과 아주 유사한 것이다.
저우언라이(주은래)의 사망과 그를 추모하기 위한 민중의 열정이 76년 4월 천안문 시위를 불렀듯이 89년 천안문 사태의 발단은 그해 4월15일에 있은 개혁파 후야오방(호요방)의 갑작스런 죽음이었다. 모가 76년 천안문 사건을 빌미로 등 제거라는 정치적 승리를 거둔 장칭(강청) 등 4인방 세력 대신 제3의 인물을 총리로 임명, 후계자로 삼았듯이 등도 89년 천안문 사태 진압의 주역인 이총리나 전인대 상무위원장 차오스(교석) 대신 제3의 인물인 강을 후계자로 낙점했다. 화의 권력기반이 취약했듯이 강의 권력기반도 취약했다.
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5개월과 7년이라는 시간적 차이가 있다. 화는 총리임명 5개월만에 모의 죽음을 맞아 자신의 권력기반을 다질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반면 강은 7년여간의 긴 「수습기간」을 거쳐 탄탄한 기반을 구축한 것이다.
등은 89년 11월 자신이 가지고 있던 마지막 공직인 중앙군사위 주석직을 물려주었으며 92년10월 14차 당대회 당시 군부최고 실력자였던 양상쿤(양상곤)―양바이빙(양백) 형제를 퇴진시켜 장래 다가올 강체제의 주요 위협요소를 제거했다. 또한 93년 3월에는 국가주석직을 겸직시켜 당·정·군의 최고위직을 그에게 몰아 주었다. 또한 원로들의 관여를 배제하기 위해 14차 당대회때 중앙 고문위를 폐지하고 94년에는 개혁파인 완리(만리)를 원로그룹에 참여시켜 그들을 견제토록 했다.
권력기반 강화를 위한 강 자신의 노력도 간과할 수 없다. 그는 상하이(상해)에서 함께 일했던 동료들을 요직에 기용, 이른바 상하이파를 구축해 놓고 있다. 이런 점 등으로 볼 때 강은 화처럼 쉽사리 무너지지 않을 것이며 그를 핵심으로 한 집단지도체제가 의외로 오랫동안 존속할 것이라는 견해가 설득력을 갖는다.
그러나 강중심의 집단지도체제는 각 세력이 균형을 이루는 상태여서 적절한 조정자가 있어야만 유지 가능한 것인데 이 역할을 맡았던 등이 사라진 이상 권력투쟁이라는 「통과의례」가 불가피할 것이라는 견해도 만만치 않다.
강체제에 대한 제1의 도전자로 지목되는 인물은 이총리이다. 그가 원로세력 및 관료그룹을 배경으로 최고권력에 도전할 가능성은 충분하다. 천안문 사태 진압의 주역이었다는 사실은 그의 아킬레스건이면서도 동시에 강점이기도 하다. 또 다른 도전자로는 교가 주목된다. 공안계통을 관장하고 있는 그는 87년 호의 실각때, 그리고 89년 천안문 사태때 총서기 후보로 가장 강력하게 거론됐던 인물이다.
지도부내의 권력투쟁이 쉽사리 승부를 내지 못할 경우 주룽지(주용기) 부총리, 후진타오(호금도) 등이 대안으로 떠오를 가능성도 있다. 주는 강력한 리더십이, 호는 젊고 패기찬 차세대 리더라는 점이 강점으로 지적된다.
강에 대한 강력한 도전자는 정작 집권층 내부보다 밖에 있을지 모른다. 자오쯔양(조자양) 전 총서기는 천안문사태이후 등체제와 타협을 거부하며 「등 사후의 대안」으로서 자신의 정치적 무게를 불려왔다.
그는 현재 진행되고 있는 경제개혁의 원설계자이며 또한 정치개혁의 주창자였다는 점에서 폭넓은 대중적 지지를 얻고있는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그는 강과의 타협이 여의치 않을 경우 역시 등 사후를 기약해 온 양상쿤과 연합하는 길을 택할지도 모른다.<베이징=특별취재단>베이징=특별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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