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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소평 사망­파란의 93년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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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소평 사망­파란의 93년 생애

입력
1997.02.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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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억 중국 대변혁 이끈 ‘무관의 황제’/지주의 장남 탄생 16세때 불 유학/변혁기 실각·재기 거듭한 ‘불도옹’/개혁·개방 불댕겨 ‘죽의 장막’ 걷어/89년 천안문사태 유혈진압 오점덩샤오핑(등소평)은 78년 집권한 이후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직책을 초월해 최고권력을 행사했던 중국 역사상 특이한 「무관의 황제」였다. 등을 흔히들 태상황에 비유한다. 그러나 등은 한번도 명목상의 최고위치, 즉 「황제」의 위치에 오른 적이 없다. 당직으로는 정치국 상무위원, 정부 직책으로는 부총리가 그가 오른 최고직위였다. 「무관의 황제」로서 등의 존재를 뚜렷하게 보여준 것은 92년 2월 이른바 남순강화때였다. 당과 정부내에 아무런 직책도 갖지않은, 당시 은퇴한 평당원 신분의 등은 광둥(광동) 상하이(상해) 등 남부 개방지역의 시찰을 통해 89년 천안문 사태이후 보수적 정책기조를 단번에 뒤엎었다. 또한 지지부진하기만 하던 개혁 개방 분위기를 순식간에 일신했다. 등의 남순은 천안문 사태를 기화로 개혁세력을 대거 정치의 중심부에서 밀어내고 모든 부문에서 압도적 우위를 차지한 보수파에 대한 강도높은 반격이었다. 『대담한 개방』 『시장은 자본주의가 아니다』라는 발언은 마오쩌둥(모택동)의 표현을 빌자면 『마른 초원에 던져진 한 점의 불꽃』이었다. 개혁파가 숨을 죽이고 있던 시점에 이루어진 등의 이 「단기공격」은 등의 완벽한 승리로 끝났고 그해 10월 14차 당대회에서 시장경제 원리을 채택케 했다. 등과 모는 전후 중국을 지배한 권력자들이었지만 노선면에서는 대조적이었다. 모는 자신의 이상에 중국을 꿰맞추려한 이상주의자였다. 반면 등은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현실주의자였다. 그러나 권력을 장악하고 그것을 유지하는 수법만 본다면 둘은 스승과 수제자의 관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등의 남순은 권력의 중심권에서 소외되자 상하이로 물러나 있으면서 문화대혁명을 발동, 결국 권력 탈환에 성공한 모의 수법을 충실히 활용하고 있다. 등은 또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는 모의 말을 모 이상으로 신봉했다. 그의 마지막 공직이 89년 11월 장쩌민(강택민)에게 넘겨준 군사위 주석직이라는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모가 후계자에게 조차 반란을 감행하는 「반란기계」였다면 등은 그런 모 앞에서 당당하게 자기소신을 펼친 「반골」이었다. 모는 「반골」을 후계자로 삼지는 않았지만 그를 정치적으로 말살하지도 않았다. 등은 집권후 모를 극복하려 했지만 배척하려 들지는 않았다. 오늘날까지 천안문에 내걸린 모의 초상화가 이를 증명한다.

정책 노선면에서 볼때 등은 저우언라이(주은래) 류샤오치(유소기)를 계승한 인물이다. 78년 집권이후 4대 현대화 노선을 주창하며 개혁 개방을 착실하게 추진, 문화대혁명을 겪으면서 황폐할대로 황폐해진 중국을 세계 11대 무역대국으로 끌어올렸다. 등 지배하에서 중국은 「죽의 장막」을 거두었고 21세기의 잠재 경제대국으로 변신했다. 그리고 전세기 중국의 치욕의 상징이던 홍콩과 마카오를 금세기가 끝나기 전에 반환받을 길을 터놓았다. 이같은 등의 공은 89년 천안문 사태의 유혈진압으로 오점을 남겼다. 후세의 중국인들이 등을 어떻게 평가할지는 수수께끼이다.

등은 1904년 쓰촨(사천)성 광안(광안)현 시에싱(협흥)향 파이방(패방)촌에서 지주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6세 때 프랑스 유학을 위해 고향을 떠난 그는 죽을 때까지 한번도 고향을 다시 찾지 않았다.

노동자로 일하며 공부했던 7년간의 프랑스 유학생활은 그의 인생의 방향을 결정했다. 즉 사회주의 운동으로 길을 잡게 됐던 것이다. 그는 프랑스에서 주와 처음 만났다. 주와 등이 국수주의적인 모와 달리 개방파였던 것은 모에게는 없었던 외국 유학의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등은 26년에는 모스크바의 중산대학에서 본격적인 공산주의 학습을 받고 27년 귀국하면서 공산주의 활동으로 들어갔다.

등의 초기 결혼생활은 매우 불운했다. 그는 중산대학에서 만난 장시완(장석완)과 27년 결혼했으나 1년반만에 사별했다. 프랑스 유학시절 동료였던 그의 두번째 부인 진웨이잉(김유영)은 30년대 초 1차 숙청된 등을 비판하는데 앞장섰던 리웨이한(이유한)의 품으로 달려갔다.

장정에 앞서 마오쩌둥의 당 지배권이 확립되면서 복권된 등은 이후 66년 문화대혁명까지 순탄한 정치생애를 보냈다. 49년 공산정권 수립후 51년 티베트 진공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베이징(북경)에 돌아온 등은 52년 부총리에 임명됐고 재무장관과 국방위원회 부주임 등을 역임했다. 이 기간에 벌어진 중소이념분쟁에서 등은 선봉장 노릇을 했으며 이때 모가 그를 가리켜 「떠오르는 태양」이라고 치켜세웠다.

그러나 66년부터 문화대혁명의 격풍이 중국대륙을 휩쓸었고 등도 여기에 휘말리고 말았다. 모는 등을 유 다음가는 당내 주자파로 공격했다. 58년부터 60년까지 추진된 「사회주의 총노선 건설」 「대약진 운동」 「인민공사」 등 삼면홍기 정책의 실패에 따라 정치 일선에서 잠시 물러나있던 모는 농민에 대한 자유경작 허용 등과 같은 유·등의 우경적 정책에 불만을 품고 탈권을 위해 문화대혁명의 불을 붙였던 것이다.

모는 상하이에서 웅크리고 있으면서 홍위병 세력을 동원, 중앙인 베이징을 공격하는 전법을 구사했다. 유는 소련에서 흐루시초프를 실각시키는 방식으로 모에 대항하려 했으나 등은 결정적 순간에 발을 뺐다. 훗날 권력기반을 강화한 모는 이런 인연으로 등을 재등용했다. 장시(강서)성에 하방돼 노동개조를 받던 등은 73년 린파오(림표)의 실각으로 부총리로 복권됐다. 주의 후원이 결정적이었다. 모는 림이 군부 안에 심어놓은 세력을 거세하는 인물로 등을 이용했던 것이다.

75년 당 부주석 및 정치국 상무위원, 군 참모총장에 임명된 그는 76년 4월 청명절 천안문시위 사건의 배후로 지목돼 또다시 실각했다. 그해 1월 주가 사망했고 일반 민중들이 그를 추모해 화환을 바쳤으나 장칭(강청) 등 4인방 일파가 하룻밤새 이를 철거했다. 이 때문에 시위사건이 발생했고 모는 이 사건의 책임을 등에게 물었던 것이다. 일종의 토사구팽이었다. 림의 추종세력의 청소가 끝나자 위험인물 등을 용도폐기한 것이다.

모는 그해 9월 사망했다. 모의 말년에 권력을 장악했던 4인방은 모가 후계자로 지목한 화궈펑(화국봉)과 친 등 세력의 연합으로 축출됐지만 권력은 여전히 모의 지시가 옳다는 화 등 문혁 잔존세력의 수중에 놓여 있었다. 77년 7월 중국공산당 10기 3중전회에서 등은 결국 복권됐다. 등이 군 기반이 없는 화를 일순간에 밀어냈고, 78년 12월 중국공산당 11기 3중전회에서 중국 공산당의 노선 전환을 성취했다. 완벽하게 권력을 장악한 것이다.

등은 집권 후 자신이 전면에 나서지 않았다. 당주석제를 폐지하고 당 총서기제를 도입, 자신의 오른팔인 후야오방(호요방)을 앉혔으며 총리직에 왼팔인 자오쯔양(조자양)을 임명, 개혁개방 정책에 드라이브를 걸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반문혁 세력도 개혁파와 보수파로 분열했다. 개혁파인 호는 시장경제의 도입의 한계를 주장하는 보수파 천윈(진운)의 벽을 뚫기위해 86년말부터 불붙기 시작한 학생운동에 동조했다. 후계자와 보수파 간에 첨예한 대립이 벌어지자 등은 자신의 오른팔을 총서기직에서 몰아냈다. 87년 1월의 일이다.

등은 조를 총서기로 옮겨 앉히고 보수파인 리펑(이붕)을 총리로 삼아 보혁 간의 세력균형을 추구했다. 그러나 이같은 균형은 89년 4월 호의 사망과 이에 따른 천안문 시위 사태의 발발로 파탄을 맞았다. 또 다시 전개된 보혁대결에서 등은 호 축출 때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왼팔인 조를 버렸다. 그리고 양상쿤(양상곤)―양바이빙(양백) 형제의 군사력을 동원해 학생시위를 유혈진압했다.

등이 세번째로 선택한 후계자는 장쩌민(강택민)이었다. 89년 이후 죽음에 이를 때까지 등이 추구한 것은 두가지이다. 개혁을 가속화하는 일과, 취약한 기반을 지닌 강의 권력입지를 강화하는 것이다.

등은 세번째 부인 주오린(탁림)과는 39년 옌안(연안)에서 결혼했다. 탁은 등과의 사이에 아들 둘과 딸 셋을 낳았다. 장남 덩푸팡(등박방)은 문혁 당시 홍위병들에 의해 하반신 불구가 되었으며 현재는 중국 장애인 복지기금회 이사장직에 있다. 둘째 아들 덩즈팡(등질방)은 미국 유학을 다녀왔으며 현재는 사업을 하고 있다. 첫째딸 덩린(등림)은 화가로, 둘째딸 덩난(등남)은 국가과학기술위원회 부주임(차관급)으로 활동 중이고 셋째딸 덩룽(등용)은 등의 비서 역할을 했으며 93년에 중국 공산정권 수립 이전까지 등의 일생을 다룬 「나의 아버지 덩샤오핑(등소평)」상을 출간했다.<류동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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