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공동화 촉진/러시아·동구권 유학/온건파 지식인들 조직적 행동 계기로황장엽 북한노동당비서의 망명은 평양과 북한 전역에 포진해 있는 권력의 소프트웨어와 많은 개혁지향의 온건파 지성인에게 개혁을 추진하려는 조직적 행동을 자극시키는 계기가 될 것 같다. 이와 함께 북한지성의 대부인 그의 망명은 북한에 사상 공동화현상을 촉진시킬 것으로 보인다. 황장엽은 북한을 변화시키기 위한 외곽기지로 한국과 서방세계를 활용하려 들 것으로 전망된다.
이같은 전망은 그의 이력을 살펴보면 어렵지 않게 유추될 수 있다.
황장엽은 북한이 46년 9월 공산정권을 세운 뒤 젊은 신진들을 러시아와 동구권에 유학 보냈을 때 그 일원으로 모스크바에 유학했다. 빨치산 출신이 아니라 비교적 빨리 개안한 지식인이다.
북한은 러시아 동독 폴란드 체코 등과 과학문화교류 협정을 맺었는데, 이 협정은 상호주의에 의거했으나 실질적으로는 같은 공산국가라도 후진국에 속하는 북한유학생의 경비를 이들 초청국이 부담하는 것이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김일성의 동생 김영주를 비롯, 양형섭 허담 황장엽 등으로 이들은 모스크바 대학에서 유학했다. 한편 강성산 연형묵 김환 등은 체코의 프라하 공과대학에서 이공학을 전공했다. 그들은 6·25를 전후해 공부를 마치고 귀국, 4차경제개발 계획기간이자 6·25전쟁복구기간이던 50년대 중반부터 노동당 행정부 기업소 대학 등지에서 중추역을 담당한다. 이들은 북한정권을 지탱해 온 해외유학파 혁명 1세대로 자리매김된다.
김일성의 동생이며 김정일의 삼촌인 국가부주석 김영주는 혁명 1세대 해외유학파 대표주자이다. 그는 46년에 타타르지역의 타시이티대학에서 1년간 러시아어를 배우고 모스크바대학에서 47부터 52년까지 법학을 전공했다.
황장엽과 같이 공부한 러시아의 고려인 3세 한 막스 교수에 따르면 그는 3년간 도서관에서 거의 밤을 새우다시피 노력한 끝에 53년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황장엽에게 영향을 준 사상가는 포이에르바흐 헤겔 푸르동 듀링그 등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 그리고 레닌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그는 이같은 기초위에서 일본유학과 해방전후의 남한 학계 등을 두루 섭렵한 폭넓은 학문적 지식을 동원해 유물사관의 변증법을 북한 공산정권의 이론으로 체계화시켰다.
56년 3월, 20차 소련 공산당 대회에서 후루시초프가 지도자 개인숭배, 일인장기집권을 비판하는 스탈린 격하운동을 주도하자 그 분위기가 평양에도 전해졌다. 김일성은 56년 노동당 전체회의에서 6·25전후 복구와 경제발전의 지지부진을 빌미로 소련파와 연안파의 제휴세력에 협공 당했다. 김일성은 그러나 이를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아 대대적인 숙청작업을 벌이는 한편 정치적 자주, 경제적 자립, 군사적 자위를 기치로 내건 국가를 건설한다면서 소위 주체사상을 주창한다. 주체사상은 주체적으로 자기운명을 개척해 노동당 아래에 하나로 뭉치자는 정치구호였다. 물론 황장엽은 주체사상의 이론적 기초를 제공했다.
그러나 60년대 이후 주체사상이 김일성 우상화작업으로 변질되는 와중에서 그는 학자로서 번민하고, 동구권의 변화를 보며 좌절을 느낀다. 급기야는 김일성사망후 김정일은 지도력 차별화를 시도하고 혁명1세대인 황장엽의 사상은 새로운 지도자에 의해 용도폐기될 지경에 이르게 된다. 그렇다고 김정일 주변에 40∼50대의 국내외 연구경험과 이론으로 무장된 신세대 「황장엽」이 있는 것도 아니다. 북한정권은 황장엽세대 이후 사회과학분야 젊은이를 해외로 내 보내지 않았다.
황장엽은 김일성이 살아 있을때 중국의 개혁모델을 김일성의 이해 아래 공론화시켰고 김일성 사후에도 이를 주장했다.
그러나 빨치산 시대에서부터 군에서 성장한 원로그룹과 군부 강경파들은 황장엽의 이같은 개혁주장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의 건재가 권력의 대차대조표에서 손실로 나타나는 김정일 측근들 역시 황장엽의 개혁노선을 반대했다. 그러자 황장엽은 눈을 밖으로 돌렸고 망명신청을 하게 됐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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