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그룹의 은행지배허용 여부가 재계와 금융계에서 큰 논란이 되고 있다. 한보사태를 계기로 은행의 책임경영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재벌의 은행소유를 허용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한국은행도 산업자본(재벌)의 은행 소유·지배여부를 중장기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반면 재벌이 은행을 소유하면 주요 은행들이 재벌의 사금고로 변질되고 경제력집중현상이 더욱 가속화할 것이라며 재벌의 은행소유 절대불허론도 만만치 않다. 은행의 소유현황과 양측 의견을 들어본다.<편집자 주> ◎찬성입장/손병두 전경련 상근부회장/주인 있어야 책임경영·효율성 제고/사금고화 막게 ‘과점체제’가 바람직 편집자>
은행의 소유구조문제가 초미의 관심사로 대두되는 이유는 책임경영체제확립을 통한 은행경영의 효율성제고가 시급하고, 국내외 금융기관간의 경쟁심화로 은행산업의 경쟁력강화를 위해 은행에 주인을 찾아주어 책임경영체제를 구축해야 한다는 주장이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은행의 소유구조는 크게 산업자본과 금융자본의 분리원칙이 지켜지고 있다. 그러나 증권 보험 등 비은행부문의 경우에는 일부 지분제한이 있지만 산업자본의 금융산업지분참여가 광범위하게 이뤄지고 있다. 산업자본이 금융자본에 참여함으로써 기대되는 긍정적인 측면은 확실한 주인이 있어 책임경영체제확립에 따른 생산성향상이나 경쟁력제고, 규모 및 범위의 경제실현을 기대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정부당국은 경제력집중심화, 은행의 사금고화, 경쟁기업에 대한 대출제한, 특정기업에 대한 편중여신, 산업자본 부실에 따른 금융기관의 도산위험증가 등의 부정적 이유로 산업자본과 금융자본간의 분리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이와같은 정책기조아래서는 은행의 주인찾아주기가 아주 요원하다. 은행에 주인을 찾아주기 위해서는 은행산업의 시장구조를 경쟁화하고 은행경영에 대한 감독기능을 강화한다는 원칙아래 다음과 같은 방안들이 모색되어야 한다.
첫째, 산업자본이 금융자본에 참여할때 독점적인 지배주주를 형성하기보다는 2∼3인의 과점체제로 나아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예를 들어 보람은행의 경우 두산 LG 코오롱 등 산업자본이 대주주로 참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호간의 견제로 사금고화의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둘째, 책임있는 은행경영체제를 확립시키기 위하여 주주 이외의 외부압력으로부터 독립된 경영이 가능하도록 정부는 규제대신 감독기능을 강화하고, 은행의 자율성을 보장하여야 한다. 그동안 정부는 은행의 효율성제고를 위하여 주인이 있어야 한다는 인식에도 불구하고 산업자본이 금융자본을 지배해서는 안되며, 전문경영체제를 유지하면서 책임질 수 없는 전문경영인에게 경영권을 제공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논리적 모순에 의하여 금융기관의 부실화를 자초했다
향후 정부개입을 축소하고 은행의 경영주체가 민간부문에 있다면 경영성과가 좋고 나쁨에 따른 결정은 시장기능에 의해 이루어져야 한다. 이를 위하여 주주들에게 주주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은행경영진을 주주총회에서 선임하게 하고 경영진 선임에 대하여 감독기관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
셋째, 정부는 은행의 지배구조에 대한 입장을 재정립하여야 한다. 외국인에게는 은행진입을 허용하면서 국내 산업자본에게는 경제력집중의 이유를 들어 대기업의 경영참여를 제한하거나 금융기관이 인수합병을 통하여 다른 금융기관을 지배하도록 허용하는 것은 형평성에 어긋난다.
◎반대입장/전성인 홍익대 경제학과 교수/모기업 편중대출땐 경영난 불보듯/고양이에게 생선가게 맡기는 꼴
재벌의 은행경영참여 논의는 「은행의 주인 찾아주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주장에 따르면 한보사태에서도 보듯이 은행의 대출이 외압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상황을 청산하기 위해서는 하루빨리 은행에 확실한 주인을 찾아주는 것이 필요하고 이를 위해서는 재벌의 은행경영참여도 배제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은행이 외압에 의해 좌지우지되어온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은행에 확실한 주인의식과 책임의식을 불어넣는 것도 필요하다. 그러나 앞의 명제를 인정한다고 해서 재벌의 은행소유가 정당화되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첫째, 한보사태에서 보듯이 한보상호신용금고는 모기업인 한보에게 많은 돈을 대출해주었다가 심각한 경영난에 봉착했다. 재벌이 금융기관을 소유한다고 해서 해당 금융기관에 확실한 책임의식과 주인의식이 생기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금융기관을 소유한 주인의 동기와 목적이다. 주인의 목적이 금융기관을 이용하고 심지어는 희생하여 다른 목적을 추구하는 것이라면 확실한 주인은 마치 생선가게를 유린하는 고양이와 흡사한 것이다.
두번째 문제는 과연 재벌이라는 주인이 은행을 경영할때 성실한 경영자로 기능할 것인지 아니면 흑심을 품은 고양이로 행동할지의 여부이다. 혹자는 이미 증권업이나 보험업에 진출한 재벌이 해당 금융기관을 비효율적으로 경영한다는 증거가 어디에 있느냐는 논의를 펴기도 한다. 그러나 은행은 증권이나 보험과는 다르다. 은행은 기껏해야 회사채를 발행하는데 도움을 주거나, 비자금을 조성하고 계열사를 지배하는데 유익한 증권·보험업과는 달리 직접 기업에 운전 및 설비자금을 공급하는 곳이다. 직접적인 자금줄을 확보한 기업과 그렇지 않은 기업간에 생산성만을 가지고 경쟁이 되지않을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이치이다.
한보가 단기간에 번듯한 재벌그룹의 반열에 합류할 수 있었던 것도 생산성의 우위가 아니라 은행의 특혜대출에 기인했다는 점은 이미 사실로 증명된 바다. 은행이 취급하는 요구불예금은 곧 돈이고 수표와 어음은 자본주의의 경제를 지탱하는 혈액과도 같다. 은행은 이런 점에서 사실상의 화폐발행기관이라 할 수 있다. 또 경제거래의 결제서비스를 담당하고 있다. 이는 타금융기관과의 결정적 차이점이다.
일반 사기업과는 비교가 되지않을 정도로 은행제도의 효율성과 안정성에 정책당국이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만일 한보가 시중은행을 소유하고 있었다면 한보사태의 파장은 다른 금융기관이 금융사고를 낸 것과는 비교도 되지않을 정도로 컸을 것이다. 책임의식을 갖는 효율적인 은행을 육성하는 것은 우리경제의 당면과제이다. 그러나 재벌이 은행을 소유하게 방치하는 것은 이같은 정책목표를 달성하기보다는 오히려 은행제도를 더 큰 위험으로 몰아갈 뿐이다. 그리고 결국 그 부담은 국민의 어깨를 무겁게 짓누를 것이다.
◎94년 동일인 지분한도 4%내로 제한 강화/최근 신설·지방은 중심 재벌소유확대 추세
재벌의 은행소유가 봉쇄되기 시작한 것은 「5·16」직후인 60년대초부터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부정축재처리법」을 제정(61년), 부정축재를 몰수하면서 기업가들의 은행주식도 몰수했다. 이에따라 은행의 주인은 정부가 됐다. 당시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은 조흥·상업·한일은행 등의 최대주주로 삼성그룹 임직원을 이들 은행에 파견·근무시킬 만큼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박대통령은 70년 「금융기관에 대한 임시조치법」을 통해 소유지분에 관계없이 민간인의 의결권을 10%이내로 제한했으며 72년 상업은행의 민영화를 시작으로 은행 민영화를 추진하기 시작했다. 80년대 들어 비록 형식적인 것이긴 하지만 자율적인 은행인사권이 보장되는 등 본격적인 민영화가 추진됐다.
그러나 82년 은행법 개정으로 특정인의 시중은행 지분소유한도가 8%를 넘지못하도록 제한돼 재벌의 은행소유의 길은 여전히 원천봉쇄됐다. 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초에 걸쳐 설립되기 시작한 지방은행에 대해서는 소유제한이 없었으나 92년 은행법 시행령 개정으로 동일인이 15%이상 지분을 소유하지 못하도록 제한됐다. 정부는 94년 동일인의 시중은행 지분소유한도를 8%에서 4%로(지방은 15%) 낮춰 특정인의 은행소유제한은 더욱 강화됐다. 하나·보람은행 등 90년초에 투자금융사에서 은행으로 전환한 경우 예외적으로 8%까지 허용됐으며 외국인합작은행은 외국인지분을 넘지않는 범위에서 소유할 수 있게 돼있다.
그러나 정부의 제한에도 불구, 재벌의 은행소유는 점차 확대되고 있는 추세다. 한미은행의 경우 설립시 49%의 지분을 갖고 있던 아메리카은행(BOA)이 지분을 매각, 대우·삼성그룹 등이 BOA와 같은 18.55%(작년 12월31일 현재)를 각각 보유하고 있으며 금호그룹이 광주은행, 롯데그룹이 충청은행의 주식을 15% 가까이 보유, 사실상 계열관계를 맺고 있다.<유승호 기자>유승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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