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직대통령서 재벌까지 대형비리 수사때면 으레 등장하는 중수부/그러나 그 무서운 칼날도 권력핵심을 향할때면 항상 무뎌지기만 했는데…95년 11월초 노태우 전 대통령에 이어 현대그룹 정주영 명예회장,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 LG그룹 구자경 회장 등 내로라 하는 재벌총수 40여명이 연일 대검찰청 중앙수사부로 불려 들어갔다. 이는 검찰사상 초유의 일로 중수부의 위력과 명성을 실감케 할 만했다.
이철희·장영자 부부 어음사기사건, 명성사건, 5공비리, 수서사건, 군인사 비리, 율곡사업 비리, 노태우씨 비자금사건, 현재의 한보특혜비리 사건에 이르기까지 대형사건 수사는 으레 중수부의 몫이었다. 중수부는 검찰총장의 직할 수사조직으로 권력층과 정치인, 고위 관료와 군장성 등 세도가들이 연루된 굵직굵직한 사건을 맡아 「나는 새도 떨어 뜨린다」는 거물을 단죄한다.
그래서 중수부가 수사를 시작하면 정국에 큰 영향을 미치고 국민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5공비리 수사 때 중수부에 소환된 한 중앙부처 국장이 쩔쩔 매다가 끝내는 오물을 흘리고 말았다는 일화는 고위 공직자들의 중수부 공포증을 가늠케 한다.
그러나 얼핏 무소불위로 보이는 중수부의 칼날도 권력 핵심을 향할 때는 무뎌지기만 했던 것이 그동안의 예였다. 청와대의 「허락」이 떨어지고서야 수사에 착수하는가 하면 권력 핵심의 비리는 덮어버리곤 했다. 6공때의 수서사건과 현 정권 출범초기의 안영모 동화은행장 비자금사건 수사결과는 중수부가 휘두르는 칼날의 한계를 극명하게 보여 준 사례이다.
정의의 칼날로 비유되는 검찰이지만 「권력의 시녀」나 「정권의 파수꾼」으로 낮춰 보는 시각이 무성한 것도 이 때문이다.
또한 정권이 바뀌면 「엄정한 수사권」을 내세워 새 정권의 정치기반을 다지는 방패막이 역할에 나서곤 했다는 비판도 있다. 현 정권 초기 박철언씨가 관련된 슬롯머신사건(서울지검 특수부)과 박태준 전 포철회장 뇌물수수사건 수사 등의 「개혁사정」때 일부에서 보복·표적수사 시비가 있었던 것이 그 예라 할 수 있다.
검찰의 한 고위관계자는 『검찰권이 통치권 위에 있을 수는 없지 않느냐』며 『대형사건 수사때 중수부장이 나서는 것은 아니지만 총장이나 법무부장관이 청와대와 조율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그는 『여러 경로로 대통령의 의중을 읽어 수사 착수 여부 및 시기, 수사범위 등을 알아서 조절하는 것』이라고 완곡히 설명했는데 이는 중수부의 대형사건 수사과정에서 검찰 상층부와 청와대 사이에 긴밀한 의견 교환이 이뤄졌음을 시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중수부는 한보사건이 터진 후 「선 수습 후 수사」 원칙을 내세웠다가 김영삼 대통령의 「성역없는 수사」 지시가 떨어지자 그제서야 발걸음을 빨리 했다. 또 당초 세간의 설만으로는 김대통령의 차남 현철씨를 조사할 수 없다는 방침을 고수하다가 고소인 자격의 조사로 바꾸었다. 애초의 완강했던 태도를 감안하면 청와대와 사전교감 없이 검찰이 독자적으로 결정했다고는 믿어지지 않는다.
현철씨에 대한 조사가 「해명」에 그치고 한보사건의 핵심인 외압의 실체와 비자금 사용처 추적은 결국 다음 정권 중수부의 몫이 되리라는 성급한 전망이 나오는 것도 그런 때문이다.
노태우씨 비자금사건 수사를 지휘했던 안강민 당시 중수부장(현 서울지검장)은 『전직 대통령의 비자금 수사착수는 독자적인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며 『수사과정에서 청와대에 일일보고를 하지도 않았다』고 밝혔다. 그는 또 한보사건 수사에 대해서도 『옆에서 보기에는 외압없이 수사계획대로 잘 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외풍을 막는 것은 전적으로 검찰총장의 역할』이라며 『중수부장보다는 검찰총장이 누구냐에 따라 수사결과가 달라 질 수 있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중수부장을 지낸 한 변호사는 『한보사건의 핵심을 못 건드리면 불신만 남는다』며 『수사가 제대로 안 될 경우 검찰이 모든 잘못을 다 뒤집어 쓰게 된다』고 말했다. 그는 『특수 수사라는 게 잘해야 본전』이라고 회고했다. 「특수사건」의 성격상 잘하면 당연한 것이고 조금만 미진한 부분이 있어도 비난이 쏟아진다는 것이다.
한보사건 수사가 막바지에 이를 무렵 취재팀이 인터뷰를 시도한 역대 중수부장들 대부분은 『지금은 때가 좋지 않다』고 피했고 억지로 찾아 가 만난 경우에도 『후배들에 누가 될 수 있다』며 거의 입을 다물었다. 또 자신들이 맡았던 과거 대형사건과 관련해서는 이구동성으로 『검찰은 제대로 수사를 했지만 언론이 너무 앞서 나가 여론의 기대치를 높인 결과 늘 불만스런 것으로 비친 측면이 크다』고 말했다.
그러나 대형사건 수사에 참여했던 검사가 외압에 의한 수사 미진을 증언한 사례도 있다는 점에서 이같은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안영모 동화은행장 대출비리 사건때 대검 검찰연구관으로 수사에 참여했던 함승희 변호사는 「성역은 없다」라는 저서에서 수백억원대의 비자금 계좌를 찾아내 정·관·재계가 얽힌 부패의 사슬을 확인할 수 있었으나 상부지시로 수사가 중단됐다고 기록하고 있다.
특별수사 경력이 있는 한 변호사는 『중수부는 주로 권력층이 관련된 대형사건을 다루는 만큼 수사과정에서 정치권이나 청와대의 눈치를 보게 된다』며 『검찰총장의 하명사건을 수사하는 중수부부터 엄정한 검찰권을 행사하는데 앞장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검찰은 봐주려면 갖가지 상황논리를 만들어 내고 봐주지 않으려면 범법행위만 부각시킨다』며 『상식으로 납득할 수 있는 동일한 잣대가 있어야 하는데 고무줄 기준인 경우도 없지 않다』고 덧붙였다.<이진동 기자>이진동>
◎어느 중수부검사의 하루/한보사건후 20여일 귀가못한채 새벽까지 밤샘수사 강행군/‘스타정치’ 검사 갈림길 중압감
한보사건 주임검사인 박상길(45·사시 19회) 대검 중앙수사부 2과장의 최근 20여일은 피말리는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지난달 27일 이 사건 주임검사로 지명되자 주위로부터 『축하한다』는 인사가 잇따랐다. 온 국민이 주목하는 사건을 맡아 국민적 평가를 받는 것은 검사라면 누구나 한번쯤 기대하게 되는 기회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나중이 문제』라고 말하는 그의 표정은 다소 굳어 보였다.
수사결과에 따라 「스타검사」가 될 수도 있지만 자칫하면 「정치검사」, 또는 「무능검사」로 낙인찍힐 수도 있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더욱이 검찰총장과 중수부장 등으로 이어지는 검찰 「PK라인」에서 벗어나 있는 서울·경기고 출신으로서의 심리적인 부담도 무시할 수 없을 터였다.
13일 아침 8시30분. 그는 어둡고 긴 터널을 지난 기분으로 정례보고를 위해 중수부장실을 찾았다. 전날 소환한 황병태·권노갑 의원과 김우석 장관에 대한 수사결과를 보고하기 위해서였다.
그가 직접 조사를 맡은 사람은 황의원. 밤을 새다시피 추궁한 끝에 2억원의 수뢰혐의를 확인했기에 그의 표정은 상당히 밝았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따라 붙어 수사결과를 묻는 기자들에게 그는 그저 『나중에 얘기하자』를 반복했다. 이미 나온 수사결과라도 함부로 입을 뗄 수 없기 때문. 사실 기자들이 그를 개인적으로 만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여직원은 『조사실에 가셨다』며 기자들을 따돌리기 일쑤이다. 요새를 방불케 하는 중수부 사무실은 원칙적으로 출입 통제 구역이다.
30분여의 회의를 마치고 중수부장 등과 총장실에 들러 잠시 보고를 한 뒤 그의 발걸음은 다시 11층 조사실로 향했다. 점심시간 직전까지 구속영장을 작성해야 했다. 점심시간에는 수사팀이 다시 청사 3층의 구내식당에 모여 식사를 하며 수사결과를 점검했다. 식사를 마치고 커피를 한 잔하며 잠시 한담을 나누었지만 후배검사인 검찰연구관들 중에는 간밤의 피로가 밀려 든 듯 연신 고개를 꾸벅거리는 이도 있었다.
황의원의 구속영장은 곧 떨어졌고 저녁 8시40분께 영장이 집행됐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다. 보름 가까이 씨름해 온 한보그룹 정태수 총회장에게선 아직도 들어야 할 말이 많이 남아 있다. 정총회장의 구속만기일인 19일까지 1분1초가 소중하다. 여느때처럼 이날도 청사에서 수사기록에 매달릴 수 밖에 없는 처지다. 수사가 시작되고서는 집구경을 해 본 적이 거의 없다. 청사 10층의 그의 사무실은 새벽녘에야 불이 꺼졌다.
그리고 이틀후 김영삼 대통령의 차남 김현철씨에 대한 조사결정이 나왔다.<이태희 기자>이태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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