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적 선 문학적 색 살아있는 초현실주의서양화가 권옥연(74) 화백의 그림에는 시와 음악이 담겨 있다. 어두운 회색톤이 지배하는 화면은 음침하고 우울한 현실을 노래한 이상의 시를 연상시키면서 장중한 느낌의 콘트라베이스 음율로 다가온다. 실제로 그는 『문학은 나의 영원한 파트너이지만 요즘 태어났으면 미술보다는 음악쪽을 택했을 것』이라고 말할 만큼 음악과 문학에 관심이 깊다. 그는 이처럼 가슴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다양한 미적 체험을 함축적인 선과 은밀한 색채로 토해낸다.
특히 자유로운 상상과 환상의 세계로 인도하는 그림 중의 하나가 바로 「사랑」이다. 70년 발표한 이 작품은 80호 크기로 해와 달이 떠있는 언덕에서 나비 한쌍이 사랑을 나누고 있는 장면을 그렸다. 검푸른 하늘에 떠있는 일그러진 해와 초승달, 나비의 몽환적인 날개짓을 사실적이고 섬세하게 묘사했다.
이 작품은 이성과 합리의 의식세계를 부정하고 새로운 현실과 생명력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전형적인 초현실주의계열에 속한다.
철저한 회색조의 모노크롬을 고집해왔던 권화백은 「사랑」에서 처음으로 원색에 가까운 색채를 구사, 각광을 받았다. 「원색물감은 짜놓은 것만 보아도 불안하다」는 그는 색채대비를 통해 화면에 생기와 희망을 불어넣음으로써 또다른 변신에 성공한 것이다. 미술평론가 유준상씨는 『권씨의 작품은 우리가 뿌리박고 있는 흙에 관한 이야기, 즉 지표의 표정이나 그 살갗의 주름같은 화면 위에 싹을 틔운 원시적인 생명의 씨앗과 같다』고 평했다. 또 칭찬에 인색했던 남관 화백도 생전에 「모처럼 마음을 적셔준 그림」이라고 극찬했다. 이 작품은 그후 프랑스의 세계적인 조각가 세자르의 주선으로 퐁피두센터에 소장될 기회가 있었으나 81년 호암미술관이 주인이 됐다.
이 작품이 발표됐던 70년은 권화백의 의식세계를 30년 가까이 사로잡고 있던 초현실주의화풍이 알찬 결실을 맺은 해이다. 일본 오사카(대판)세계박람회를 기념해 열린 「현대미술세계 100인전」 초대작가로 선정돼 초현실주의의 거장인 살바도르 달리와 후안 미로 등과 함께 작품을 전시한 것이다. 일본제국미술학교시절부터 초현실주의 선언을 외우고 다녔고, 53∼61년 파리생활 중에는 이 운동의 선구자 앙드레 브르통을 만나 영향을 받은 그로서는 최고의 영예였다.
권화백은 79년 현대화랑에서 개인전을 한 후 지금까지 전시회를 열지 않고 있다. 최고인기작가의 반열에 오른 그의 작품은 완성되기 바쁘게 새주인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해 지병을 앓던 장남을 가슴에 묻은 뒤 한동안 슬럼프에 빠졌던 그는 얼마전부터 털고 일어나 대규모 회고전과 생애 첫 화집제작 준비에 착수했다. 무대예술가인 부인 이병복(70·자유극단 대표)씨와 같이 서울 장충체육관 옆 작업실로 매일 출근, 하루 7시간 이상의 강행군을 하고 있다. 권화백은 『엄청난 슬픔을 겪으며 비로소 예술을 알게 된 것 같다』며 『앞으로 한민족의 전통미감을 베토벤의 교향곡보다 리드미컬한 모차르트나 쇼팽의 음악과 같은 분위기로 표현해보고 싶다』고 말했다.<최진환 기자>최진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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