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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의 망명(김성우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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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의 망명(김성우 에세이)

입력
1997.02.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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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이라면 우리는 분하고 원통하다. 우리나라는 사상으로 멍든 나라다. 우리의 현대사는 사상의 상쟁사다. 나라의 운명은 사상 앞에서 통곡해 왔다.광복의 기쁨을 강대국들의 이데올로기는 두 동강으로 칼질해 쪼갰다. 나라는 남북으로 갈렸다. 남에서는 남대로 사상대 사상의 대결이 있었다. 사회는 좌익과 우익의 격투장이었다. 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많은 사람들이 사상에 끌려 북으로 갔다. 건국에 소용되는 아까운 인재들도 적지않았다. 국력은 반감되었다. 6·25는 사상의 통일을 위한 내전이었다. 국토의 상처와 동족의 희생만 남긴 채 전쟁이 끝났을 때 사상은 여전히 각각으로 남아 있었다.

경제건설의 와중에서도 남에서는 반체제와 학생운동이 한사코 북의 사상을 기웃거렸다. 경제가 발전하고 남북의 격차가 켜질수록 오히려 더 친북 사상의 세력은 늘어갔다. 이것이 오늘까지의 일이다. 모두가 사상 때문이었다. 사상이 아니었으면 오롯한 통일국가로 오순도순했을 조국이 듣기만 해도 몸서리나는 사상 하나 때문에 서로 대적한 채 몽매에도 통일을 부르짖고 있다.

자본주의대 사회주의의 시합은 끝났다. 그 사상의 우열은 판가름 났다. 그런데도 아직 우리 땅에서는 세계대전이 끝난 줄도 모르는 정글 속의 패잔병처럼 북한이 맞서서 민족의 역량을 소모하고 민족정신을 황폐화시키고 있다. 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20세기는 실로 이데올로기의 세기였다. 19세기 후반의 마르크스주의는 금세기 초엽의 러시아혁명과 함께 마르크스―레닌주의로 확립되어 세계의 질서를 흔들다가 말엽에 이르러 몰락해 가고 있다. 한동안은 세계 지식인들의 양심을 설레게 한 사상이었다. 그것은 지식인의 마약이었고 진보적 지식인의 특권처럼 생각되었다. 그것이 환상이었음을 깨닫게 하는데 한 세기를 보내야 했다. 그 이데올로기의 주창자들은 한낱 이데올로그(공론가)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우리는 지금 사상의 세기말에 와 있다. 금세기에 있어서 사상의 가장 큰 희생자요 이데올로기의 제물인 우리나라는 새로운 세기와 함께 사상적 내전을 끝낼 때가 되었다. 그 징조가 황장엽 북한노동당비서의 망명이다.

황비서의 망명은 그가 북한의 소위 주체사상을 정립한 사회주의 이론의 일인자이고 보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다.

북한의 사회주의는 1960년대에 중소분쟁의 틈바구니에서 자주노선이 천명되었다. 1972년 헌법을 고치면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현실에 창조적으로 적용한 주체사상을 지도적 지침으로 삼는다」는 조항을 명기해 주체사상을 내세웠다. 사회주의의 허구성이 종주국이던 구소련과 동구권의 몰락으로 심판을 받자 당황한 북한은 1992년 개정된 현행헌법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창조적으로 적용한다는 말을 빼고 대신 「인민대중의 자주성을 실현하기 위한 혁명사상인 주체사상」을 지도적 지침으로 삼는다고 고쳤다.

스스로 공산주의의 변용을 주체사상으로 변장하려는 안간힘이 안타깝고, 하필이면 우리의 동족이, 언젠가는 통일해야 할 조국의 반신이 지구상에서 가장 고집스러운 마지막 공산주의 사상에 묶여 있다는 것이 또한 안타깝지만, 황비서의 망명은 북한이 매달리고 있는 주체사상이란 것이 실은 썩은 새끼줄임을 말해 주는 것이어서 고무적이다. 황비서는 자신이 엮었던 그 새끼줄을 스스로 끊고 도망쳐 나왔다. 「인민의 배를 굶기는 것이 무슨 사회주의냐」는 것이 그 동기다. 주체사상은 독재권력의 부자세습에 이용되어 온 도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황비서의 탈출은 그의 주체사상이 비판받아 신변의 위협을 느꼈기 때문이라는 관측도 있다. 북한에서는 어떤 형태로든 사상의 와해가 시작되고 있다는 증거일 수 있다. 권력층의 지도이념의 혼돈은 일반 시민들의 식량난보다 더 체제의 붕괴를 촉진시킬 수도 있다.

북한의 주도적 사회주의 사상가이던 황비서의 망명은 북한의 사상 자체의 망명이다. 사상이 탈출한 것이다. 사상의 귀순이요 사상의 투항이다. 그리고 사상의 귀환이라 할 수 있다. 그동안 월북했던 사람들을 대신해 돌아오고 있는 것이다. 이 백기를 신호로 반세기동안 적대했던 우리나라의 사상은 통일되려는가. 사상의 통일이 곧 국토의 통일이다.<본사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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