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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즈/‘재즈’는 없고 ‘재주’만 있다(우리문화 키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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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즈/‘재즈’는 없고 ‘재주’만 있다(우리문화 키워드)

입력
1997.02.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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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3∼4년새 일이던가/문화갈증 해결사로 나타나 갑자기 한국사회를 감염시킨 재즈 바이러스/재즈카페·재즈패션·재즈문학…/그러나 그것은 재즈 아닌 재즈,재즈없는 재즈 거품이고 통속일 수 있다/정신은 빠뜨린 채 남의 감성코드를 잘못된 곳에 입력했을 뿐/된장 맛 나는 재즈를 만들어보자바이러스? 흡사 그 형국이다.

마치 컴퓨터 바이러스처럼 90년대로 접어들어 한국 사회 전체를 「감염」시키고 마침내는 「다시 부팅(re-booting)」하고 있는 신종 바이러스가 있다. 본명은 「재즈」지만 「째즈」라 불릴 때, 더 실감난다.

불과 3, 4년 새 벌어진 일이다.

안락한 재즈 카페에서, 이제는 언제든 흐벅지게 재즈를 즐길 수 있게 됐다. 19주년을 넘긴 재즈 카페 야누스에서, 올 댓 재즈, 블루 노트, 스테레오 파일, 카멜롯 등 90년대 새로이 생겨난 것들까지.

음악으로서의 재즈 뿐만이 아니다. 모든 게 재즈이고 재즈적이다. 문학 출판은 물론이고 무용, 광고, 패션까지, 심지어 드라마 제목까지 재즈를 차용했고 지금도 유효하다. 작가는 「재즈적 글쓰기」를, 화장품회사는 「재즈 립스틱」을, 광고카피는 「재즈처럼 편안한 정장」을 외치고 대중은 이를 친숙한듯 받아들인다.

지극히 한국적인 상황이다.

왜 재즈인가? 왜 90년대인가?

「언더 문화」였던 재즈의 급격한 팽창은 문화, 또는 적어도 문화적인 것에 대한 사회의 갈증을 정확히 반영한다. 나아가 참신한 것으로 비쳐졌다. 즉흥과 변주라는 재즈 고유의 양대 논리, 해체와 모방이라는 포스트모던 시대와도 절묘하게 맞아 떨어졌다.

날렵한 스포츠카를 몰고 케니 G를 들으며 경춘가도를 질주하는 것, 우리 시대 젊음의 욕망 코드가 아닐런지. 왜? 왠지 「재지(Jazzy)」해 보이니까.

70, 80년대, 「열사」들은 「어두운 죽음의 시대」 아니면 「흩어지면 죽는다」로 기억됐다. 크든 작든, 그같은 상황은 누구에게든 부채 의식으로 다가왔다. 억압과 통제에서 벗어난 90년대, 자유로움과 대량소비의 90년대, 거기 어디쯤 「문」과 「민」의 사이에서 재즈가 둥실 솟아 올랐다.

바람은 재즈 외적인 것에서부터 불어왔다. 재즈는 이를테면 부속물로 다가왔다.

재즈가 범사회적 징후로서 맨 처음 전면에 대두했던 곳은 광고계. 30초 승부사의 재기발랄한 촉각이 사람들의 지갑을 열게 할 가장 효과적인 지렛대로, 재즈를 주목한 까닭이다.

어찌 광고뿐이랴. 글쓰기 또한 재즈를 주목했다.

시인 유하의 고백이 인상적이다. 아무것도 새로울 것 없는 케니 G의 상투성을 통과한 후에야, 덱스터 고든이나 존 콜트레인 같은 「진짜」 재즈 뮤지션들과 비로소 친해질 수 있었다고 그는 말했다. 거장들이야말로, 재즈랍시고 널리 유포된 음악의 통속성에 눈뜨게 해 준 계기였다는 것. 오락이면서 또한 예술이기도 한 재즈의 숙명을 느끼게 해 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90년대 한국에서 재즈는 그런 식으로 일반과 낯을 텄다. 그러나 사회화의 과정을 관통해 낸 재즈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더 이상 즐거운 일탈만을 고집할 수 없는 시점에 와 있다. 열풍의 정점을 막 지난듯한 지금, 재즈에는 모처럼 회고와 반성과 전망의 시간이 생겼다.

우리 시대 재즈의 기수 윈튼 마설리스에서 허비 행콕과 존 스코필드까지, 최근의 내한 붐은 참으로 화려했다. 올해 이곳을 찾을 특급 재즈 뮤지션만 하더라도 키스 재릿, 헬렌 메릴, 다이앤 리브스 등. 우리 재즈 지수를 공증해 주는 지표 같지만, 우리의 어설픈 재즈 현실이 들통나는 기회이기도 했다.

94년 마설리스의 내한 공연. 리허설을 한 번 하고난 윈튼은 수준 이하의 스피커를 아예 다 치워 버리고 공연했다. 모니터 스피커가 없어 상대의 소리를 듣기 힘들어진 멤버들은 둥그렇게 딱 붙어서서 연주하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서로의 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된 연주자들이 취했던 희한한 행동. 사정을 알 길 없는 2, 3층의 관객들은 안 들린다고 불평해 댔다.

『재즈 아닌 재즈, 재즈 없는 재즈』 지금의 상황을 두고, 색소폰 주자 이정식씨는 이렇게 결론지었다.

거품이다. 그렇다면 재즈, 아니 「우리 재즈」는 어디 있을까? 언제까지 남이 만든 감성 코드를 입력하고만 있을 것인가? 그것도 엉뚱한 데에다.

지금 재즈는 더 이상 말랑말랑한 무드 음악이기를 거부하고 있다. 「한국적 재즈」, 선구적 재즈맨들의 화두다.

이정식의 지난해 앨범 「열정(Passion)」은 그에 대한 첫 해답이다. 장고 반주에 맞춰, 직접 태평소를 분다. 오래 전부터 닦아 온 국악 실력을 처음으로 선보인 것이다. 자신의 새 목표를 그는 『이제 뚝배기, 된장 맛 재즈』라고 부른다. 국악기만으로도 재즈를 연주할 수 있어야 한다고 그는 믿는다.

세계적 프리 재즈 색소폰 주자 강태환씨는 오늘도 자신의 세계를 구축해 가고 있다. 무심히 도닦는 듯 끊이지 않는 그의 소리, 대중음악이라기 보다는 자기 발언의 형식이다.

무엇이 재즈인지 판별할 수 있는 안목과 「한국적」 재즈를 창조하려는 의지, 그를 뒷받침해 줄 수 있는 실력. 바로 여기에 재즈 한국의 운명이 걸려 있다. 지금 한국의 재즈는 「본격 적응 테스트 중」이다. 무엇이, 어떻게 살아 남을 것인가?<장병욱 기자>

◎1세대 길옥윤서 3세대 이정식·장응규·김광민까지/한국재즈 넓어진 스펙트럼

한국의 재즈사는 재즈의 역사를 참으로 많이 닮았다.

노예들이 절망을 극복하는 절규의 형식으로서 재즈를 만들어냈듯, 식민지라는 암울한 공간에서 재즈는 선택 받은 일부의 탈출구였다. 또 재즈가 머잖아 세계의 언어로 통하게 됐듯, 지금 이곳에서 재즈는 젊음의 코드다.

그 길은 험난했다, 역시 재즈의 역사를 닮아.

96년 3월, 한국 재즈의 한 시대가 끝났다. 제 1대로서의 영욕을 전형적으로 확보한 색소폰 주자 길옥윤이 68년의 삶을 다 한 것.

패티김을, 또 혜은이를 스타로 만든 재주 있는 작곡가 정도로 그를 생각하기 일쑤다. 그러나 그의 영혼을 송두리째 사로잡았던 것은 바로 재즈. 50년 일본 밀항선으로 그를 떠밀었던 것은, 경성치전 재학 중 어쩌다 듣게 된 재즈에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가고자 하는 희망이었다.

한국 재즈의 전사는 춥고 배고프다. 김정구는 당대 최고의 인기 가수로 돈방석에 올랐지만, 그의 「태평양 가극단」 악사들은 고달팠다. 그들은 어떻게든 재즈를 하고 싶어했다. 그들의 힘겨운 삶에 재즈는 해방의 소리였기 때문이다.

제2대.

유랑악단이나 나이트 클럽 악사로서의 떠돌이 삶이었다. 특출나게 잘 하면 호부의 이른바 「하우스 밴드」 악사로 뽑혔다. 또 「쇼 밴드」 악사로 홍콩·방콕 등 동남아의 네온 밤거리를 누빌 수도 있었다. 원로 드러머 최세진(63)의 절묘한 브러쉬 워킹에는 마카오 신사의 세월이 녹아 있다.

이후 한국 재즈는 눈부시게 발전했다. 이들 제 3대는 국내파와 유학파로 대별된다. 독보적 존재인 프리 뮤직 주자 강태환은 떼 놓자.

지난해 결성된 「서울 재즈 쿼텟(SJQ)」은 순한국 최고의 재즈 앙상블. 이정식(색소폰), 이영경(피아노), 장응규(베이스), 김희현(드럼) 등 넷. 평소 연습, 세션 또는 방송작업 등으로 각각 바쁘지만, 모이면 막강 재즈 캄보다.

이들의 소리는 공격적이다. 고운 소리를 굳이 거부하는 것은 보다 한국적인 재즈 어법의 탐색 작업을 놓지 않기 때문이다. 모두 가난의 시절을 겪었다. 또 박성연은 더욱 원숙해진 보컬로, 순 한국산의 진면목을 과시하고 있다.

유학파는 최근 급격 포진한 이른바 「버클리 출신」들. 김광민, 한충완, 정원영 등은 퓨전에 무게를 두는 「버클리」의 이념에 충실하다. 샌프란시스코의 클래식 명문대 버클리(Berkeley)가 아니라, 보스턴의 음악원 버클리(Berklee)라는 점은 이 기회에 확실히 해 두자.

최근 우리 재즈는 국내파·유학파의 구분이 모호해져 가는 징조도 비친다. 지난해 말 결성, 기염을 토하고 있는 「야타밴드」가 그 좋은 예.

뚝배기 재즈, 버터-아이스크림 재즈 그리고 다국적 재즈까지, 우리 재즈의 스펙트럼이 넓어지고 있다.<장병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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