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란이 뚝뚝 떨어져버린’ 시구 등 영랑의 감성에 너무나 감동/학창시절 덕수궁 모란밭 드나들며 문학인의 꿈 키우던 노래나의 학생시절에는 우리 시단의 골격을 이루고 있는 시인들이 활발하게 활동하던 때였다. 서울 계동 중앙고보 근방에는 가람 이병기, 경상도에는 청마 유치환, 서울 아현동에 정지용, 조선일보 학예부에 김기림, 가깝게 지내던 김광균, 인사동에 오장환, 종로에 있던 삼천리사에는 최정희씨가 근무하고 있어 미당 서정주씨가 가끔 놀러오곤 했다.
무슨 일만 있으면 월탄 박종화, 공초 오상순씨까지 합세해서 술자리가 벌어지곤 했다. 1939년 이화여전 문과를 졸업하고 신문사 학예부에서 근무하면서 이들과 어울릴 기회가 많았다. 미당의 「화사집」이 문고판으로 나올 때였고, 노천명씨의 첫시집 「산호림」의 출판기념회가 종로 영보빌딩에서 열리기도 했다.
우리나라에 신시가 들어온지 50주년이 되는 그 때쯤이야말로 혜성같이 빛나는 시인들의 시작활동이 왕성했던 전성기였다고 생각한다.
김영랑씨와는 자리를 같이 할 기회가 없었다. 고향인 강진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를 멀리서 한번 보았는데 몸이 뚱뚱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영랑을 알지 못하는 사람도 그의 대표작 「모란이 피기까지는」은 암송할 정도였다. 나는 「모란이 피기까지는」이라는 시제부터 마음에 들어 영랑이 이끄는 모란의 세계로 흠뻑 빠져 들었다.
당시 덕수궁 안의 모란밭은 유명했다. 사무실이 가까운 곳에 있던 나는 가끔 모란꽃을 보기 위해서 덕수궁을 드나들었다. 모란꽃이 펴서 질 때까지의 모습을 지켜보게 되었다. 특히 「모란이 뚝뚝 떨어져버린」 등의 시구에 가슴 깊이 공감하면서 시인의 황홀감에 끌려들어가기에 충분했다.
이 시의 뒷부분 넷째줄부터는 절창에 가깝다. <모란이 지고말면 그뿐 내한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예순날 하냥 섭섭해 우옵네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모란이>
모란은 영랑의 전부였을 것이다. 모란은 그에게 사랑일 수도 있고 조국일 수도 있었다. 영랑의 모란은 자연미의 아름다움 뿐 아니라 이상의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다.
삼백예순날을 하냥 섭섭해서 울고 있는 사람이 비단 영랑뿐이었겠는가. 그러나 영랑은 희망을 주고 있다.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이라며…. 나는 앞으로도 영원히 영랑의 모란을 사랑할 것이다.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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