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베니스·베를린… 이름만으로도 황홀한 영화제/최근 몇년새 수상은 고사하고 본선진출도 힘들다/한국적인 것에 얽매여 세계인의 공감을 못얻는 것일까/홍보·배급·로비 등 체계적 노력과 전문인력 부족 탓일까/“이대론 안된다” 목소리 높아가는데…칸, 베를린, 베니스, 아카데미…. 세계영화제 시즌이 다가오고 있다.
황금종려상(칸) 금곰상(베를린) 금사자상(베니스). 이름만 들어도 황홀하다.
그러나 요즘 한국 영화는? 얼굴 내밀 곳이 없다. 간신히 얼굴을 내민다 해도 쳐다보는 사람이 별로 없다.
세계적으로도 우리의 영화 소비시장은 체격이 커질만큼 커졌다. 하지만 질적 수준은 세계화와 거리가 멀다. 외화 내빈. 우리만 감동하면 무엇하나? 세계인들의 눈물을 자아내지 못하는데. 우물안 개구리.
얼마전까지만 해도 우리 영화는 틈틈이 본선에 올라 수상을 노렸다. 그러나 94년 「화엄경」(감독 장선우)이 베를린 영화제에서 본상 중 하나인 알프레드 바우어상(외국영화상)을 수상한 이후에는 이른바 3대 영화제라 불리는 칸 베를린 베니스의 수상 명단에서 찾아 볼 수 없게 됐다.
수상은 고사하고 주요 영화제의 경쟁부문에 진출하는 것조차 어렵게 됐다. 13일 개막한 베를린 영화제. 비경쟁 부문인 영 포럼과 파노라마 부문에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감독 홍상수) 「세친구」(감독 임순례) 「학생부군 신위」(감독 박철수) 「인샬라」(이민용 감독) 등이 출품됐다. 경쟁부문인 본선에 진출한 작품은 하나도 없는 것이다. 4월의 칸영화제 역시 전망이 불투명하다.
중국 대만 홍콩 베트남 이란. 우리가 예선 통과에 허덕대고 있는 사이 이들 아시아 국가는 세계 영화계의 새로운 중심으로 도약하고 있다. 주요 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거머쥐는 것은 물론, 영화제마다 각종 수상 부문에서 빠지지 않고 한자리씩을 차지한다. 장 이무(중국), 첸 카이거(중국), 후 샤오시엔(대만) 감독들은 신작을 발표할 때마다 유럽의 유명 영화제가 기다렸다는 듯 초청을 하는 거물급으로 자리잡았다.
영화의 세계화로만 보자면 제3세계 국가 중에서도 가장 후진국에 속하는 것이 우리 영화의 현주소인 것이다.
우리가 나름대로 임권택 감독 등 「거장」을 키워 왔음에도 다른 아시아 국가들에 비해 경쟁력이 뒤쳐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꾸준히 해외영화제에 출품해 온 태흥영화사 이태원 사장의 말. 『93년 이후 「서편제」 「태백산맥」 「축제」 등의 수상실패를 겪으면서 우리만이 감동하는 것이 아닌, 세계적인 공감대를 불러 일으키는 작품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그의 말대로 세계 영화의 유행과 흐름을 빨리 찾아 동시대의 감성에 맞는 이슈를 제기하는 노력이 우리 영화에는 부족했던 게 아닐까? 정치사회적, 역사적 특수성만을 앞세운 「한국적」인 작품이 물론 좋다지만 여기에 너무 얽매여 한단계 더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있다. 즉 우리의 이야기를 할 때도 세계인이 공감할 수 있는 세련된 방식과 감수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를 담담하게 그려내는 대만과 홍콩의 영화들이 주목받고 있는 이유를 돌아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일급 해외영화제에서의 쾌거는 단순히 「좋은 영화」를 만드는 것만으로도 이뤄지지 않는다. 영화평론가 정성일씨는 『첸 카이거 , 후 샤오시엔 등이 수많은 해외 영화제를 거쳐 칸과 베니스를 정복하는 데는 꼭 10년이 걸렸다』고 말한다. 체계적인 노력 없이 단번에 일급 영화제를 석권하기란 불가능하다는 지적이다.
영화 선진국의 프로덕션과 합작, 홍보나 배급을 이들에게 맡겨 해외 시장을 개척하고, 각국의 B급 영화제에 부지런히 참가해야 한다. 여기에서 명성을 쌓은 뒤 A급 영화제를 노려 기획단계서부터 준비를 해나가는 순서를 밟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해외에 우리 영화를 홍보할 전문 인력. 영화제 별로 특성과 심사위원의 성향을 파악하고 끊임없이 외국에 우리 영화를 소개하는 자리를 마련하는 「로비스트」역할이 절대적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는 이 분야의 전문인력이 거의 없는 실정이다.
영화인들은 한 목소리로 정부와 최근 영화사업에 관심을 보이고 있는 대기업들이 나서 한국영화를 잘 「포장」하는 일을 서둘러야 한다고 말한다. 영화발전소의 전은영 실장의 말. 『영화를 해외에 소개하려면 해당 국가별로 대사를 번역하거나 더빙하고 계속해서 홍보용 자료를 보내는 등 투자작업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같은 일은 영세한 영화사가 나서서 하기에는 벅차다』 대만과 이란 호주 등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 자국의 영화를 전세계에 널리 알린 사례를 본받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국제영화제에서의 수상이 중요한 것은 단순히 「자존심」의 문제만은 아니다. 유명 영화제에서 수상한 작품은 곧바로 손쉽게 해외시장에 배급되는 경로를 밟는다. 넓은 시장을 갖게 되면 국내에서보다 많은 수익을 얻고, 이것을 다시 새로운 작품에 투자할 수 있다. 따라서 보다 큰 규모와 다양한 소재의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할 수 있다.
할리우드는 새로운 시장 개척을 위해 유럽 지역의 영화제를 노리고, 세계영화제는 중국 등의 거대 시장 진출을 노려 아시아 영화에 후한 상 인심을 베풀고 있다. 최근의 이같은 경향은 영화제 수상과 돈의 흐름이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다.
세계 유수의 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받는 영화인의 모습을 보고 싶은 갈증은 얼마나 더 기다려야 풀릴 것인가? 우리 영화가 국내의 거대한 소비시장에 머물지 않고 위대한 정신과 창작의 보고로서의 자존심을 지켜 나가기 위해 모두의 힘을 모은 치밀한 준비가 필요한 때라는 게 영화인들의 한결같은 말이다.<이윤정 기자>이윤정>
◎아시아영화 약진 비결/그들은 할리우드에 물들지 않았다/독창적 시각·방식,첸 카이거 등 국제영화제 잇단 수상
그렇다면 다른 아시아 영화는 왜? 중국, 대만, 홍콩, 거기에 이제는 베트남, 이란 영화까지 줄줄이 상을 탄다. 80년대 후반부터 시작해 국제영화제에서 기세를 더해가는 그들의 영화는 우리와 무엇이 다른가?
88년 베를린 영화제는 한 작고 못생긴 동양인 장이무 감독이 만든 「붉은 수수밭」에 갈채를 아끼지 않았다. 이 영화에 주어진 금곰상(최우수 작품상)은 미래 중국영화의 영광과 잠재력의 예고였다. 엄격한 통제에서 해방된 장이무는 중국 특유의 과감한 색채미학으로 조국의 역사와 현실을 담아냈다.
70년대 이후 미학적으로 탈출구를 찾지 못하고 있는 유럽 영화인들. 과거 작품을 답습하면서 답답해 하던 그들의 눈에 비친 소위 중국의 「제5세대」 감독들은 분명 경이롭고 새로운 존재였다. 『아시아인의 시각과 방식으로 아시아인의 삶과 역사를 담아낸다』는 사실에 대한 놀라움은 장이무의 후속 작품인 「귀주이야기」(92년 베니스영화제 금사자상)와 「인생」(94년 칸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으로 이어졌다.
첸 카이거 감독도 표현 방식의 차이는 있지만 역시 중국전통에 근거해 중국의 희망과 현실과 아픔을 얘기한다. 그도 93년 「패왕별희」로 칸영화제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안았다.
비슷한 시기 검열에서 풀려난 대만영화. 89년 후 샤오시엔 감독은 「비정성시」(베니스영화제 금사자상)로 세계 영화계에 존재를 알렸다. 4년 뒤 이안 감독은 「결혼 피로연」으로 베를린의 금곰상, 이듬해 차이밍량 감독은 「애정만세」로 다시 베니스의 금사자장을 따내 그 힘을 이어갔다. 이안 감독은 지난해 「센스 앤 센서빌리티」(베를린영화제 금곰상)로 거장의 반열에 까지 올랐다.
베트남에는 트란 안 훙 감독이 있다. 93년 「그린 파파야 향기」로 칸영화제에서 황금카메라상을 받더니 2년 후 「씨클로」로 베니스영화제 금사자상을 따냈다. 이란이 낳은 스타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 89년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로 베를린영화제 동표범상(3등상 해당)을 받았다. 이후 「그리고 삶은 시작된다」, 「올리브나무 사이로」 등 그의 작품은 언제나 칸영화제 본선에 오르고 있다.
80, 90년대의 홍콩영화도 관금붕, 왕자웨이 같은 뉴웨이브 감독들이 포착한 우울하고 불안한 홍콩의 모습으로 더 이상 「아시아 오락용」이 아님을 증명했다. 관금붕은 중국배우의 얘기인 「완령옥」(92년)으로 장만옥을 베를린영화제 여우주연상을 타게 만들었다.
중국 제5세대 감독들의 「우뚝솟음」은 바른 영화교육의 덕분이었다. 그들은 할리우드 영화에 눈이 멀지 않았다. 베이징대학에서 30년대 화려하고 독창적이었던 자기 나라의 영화를 보고 배웠고, 러시아나 유럽의 예술영화를 참고했다. 그들도 국내에서 흥행에 성공하지 못하는 경우는 많다. 그러나 적어도 국내 영화를 이끌어 가고 방향을 제시하면서 수준을 높이는 역할을 한다.
국제 영화제가 생각하는 좋은 영화란? 역시 「정체성(아이덴디티)」이 있는 것이다. 영화연구가 김대현씨는 『곧 자기나라 얘기를 자기 시각과 방식과 목소리로 고민하는 영화』라고 했다. 때문에 할리우드 문법을 답습한 상업영화와 「한국적」소재 하나만으로 예술성을 보상받으려는 우리 영화를 세계영화인들이 외면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이대현 기자>이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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