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들과 어울리고 맘에드는 옷 몇벌 사면 그정도는 들어/어른들 씀씀이는 우리 10배쯤 될걸요서울 E고교 3학년인 A(19)양이 부모로부터 받는 용돈은 월 80만원선. 놀고 몸치장하는데 다 써 버린다. 씀씀이가 너무 큰 것이 아니냐는 기자의 물음에 손을 가로 저으며 말했다.
『과소비요? 우리가 좋아하는 브랜드의 옷을 입고 같은 또래가 모이는 레스토랑에서 식사하고, 가끔 나이트클럽에 가는 정도인데 그게 무슨 과소비에요? 호텔에 가는 것도 아니고 비싼 외국상표의 옷을 입는 것도 아닌데…』
A양은 몇백만원을 호가하는 밍크코트를 사 입거나 비싼 수입차를 몰고 다니는 어른들의 소비행태가 지나친 것이지 자신은 극히 정상적으로 돈을 쓰고 있다고 항변했다.
『백화점에 가 전문 디자이너 매장이 모인 숙녀복 코너에 들러 보면 가격만 보고도 놀라게 돼요. 20만∼30만원 정도인 우리 옷값에 0이 하나 더 붙어 있잖아요. 그래도 없어서 못판다는 말이 나오던데요』
A양의 말은 끊이지를 않았다. 『한번은 친구가 엄마 옷을 입고 나왔는데 서울 청담동 패션거리에 매장이 있는 유명 디자이너의 재킷이었어요. 궁금해서 그 매장을 찾아 가 값을 물어 보았더니 230만원이래요. 요즘 잘나가는 연예인이 입는 옷이라고 하더군요. 우리는 그저 잡지나 광고를 보고 마음에 드는 옷을 고르지만 어른들은 인기 드라마에 출연하는 여주인공의 옷을 보고 어느 디자이너의 옷이냐를 따져 구입한대요. 값으로 따지면 우리 옷하고 어디 비교나 되겠어요』
전문디자이너 매장의 판매원 서모(31)씨의 귀띔도 취재팀을 씁쓸하게 했다. 『신문이나 방송에서 과소비를 비판하는 보도를 내 보내면 바로 다음날 단골들이 몰려 와 비난의 표적이 된 상품을 집중적으로 찾아요』
서울 I고교 3년 B(18)양은 10대의 씀씀이가 커진 것은 특유의 소비성향 문제가 아니라 물가상승에 따른 구조적인 문제라고 주장했다. 『졸업을 앞두고 취직을 했지만 60만원의 월급이 용돈에도 못미쳐 부모님한테 부족분을 받고 있어요. 물가가 워낙 비싸요. 친구들과 식사하고 커피 한잔을 마셔도 한사람에 1만5,000원 이상이 드는데다 옷 한벌을 장만하려면 30만원은 그냥 넘어요. 또 싼게 비지떡이라고 고가품이 아닌 것은 믿을 수가 없어요. 부모님도 이왕 사려면 좋은 것을 사라고 하시니까 비싼 감이 있어도 사는거죠』
B양은 또 대부분 부모에게 용돈을 타서 쓰는 10대들이 써 봤자 얼마나 쓰겠느냐고 반문하기도 했다. 『학교 다니며 과외공부하랴 입시공부하랴 얼마나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어요? 그나마 물건 사고 가끔 놀러 가는 것으로 해결하는 거죠. 부모님들도 그걸 이해하시니까 용돈도 주고 카드도 빌려 주고 하시죠. 정말 무턱대고 돈을 쓴다면 부모님들이 허락하시겠어요?』
이들은 자신들의 눈으로도 이해할 수 없는 심한 예가 있기는 있다고 한마디 덧붙였다. 『정말 심한 애들도 있어요. 나이트클럽에서 만난 남자애들인데 마음에 든다며 다음날 100만원이 넘는 수입의류를 선물로 사주겠다고 하더군요. 그애들은 고3때부터 운전면허를 따서 차를 몰고 다니고 유흥비로 100만∼200만원을 우습게 써요. 그런 애들을 보면 저희들도 정말 이해가 되지 않아요』<염영남 기자>염영남>
◎발렌타인 초콜릿은 이제 ‘구식’/화장품·액세서리 선물 갈수록 고급화/호텔서 특별파티도
14일은 국적불명의 「발렌타인 데이」. 일본의 꾀많은 이벤트회사가 순전히 소비창출을 위해 만들어 낸 날로 서양의 전통적인 축제일과는 무관하다. 그런데도 유명백화점과 호텔 등 업계는 올해도 어김없이 갖가지 고가상품을 마련, 10대를 비롯한 젊은층의 눈길을 끌기에 바쁘다. 초콜릿은 물론, 선물용으로 많이 찾는 고가상품을 개발해 「발렌타인 특수」를 톡톡히 누리고 있다.
서울 시내 주요 백화점은 초콜릿이나 사탕에 그쳤던 과거의 발렌타인 데이 상품을 액세서리 잡화 등의 품목으로 확대하는 동시에 고급화했다. 향수 헤어크림 스킨로션 등을 섞은 화장품 특선품이 10대 청소년을 비롯한 젊은층을 끌고 있다. 할인매장에 비해 2배 가까운 가격이지만 날개돋친 듯 팔리고 있다. 가격에 관계없이 선물교환으로 속마음을 드러내고 싶어하는 젊은층의 심리가 백화점의 판매전략과 맞아 떨어지고 있는 것이다.
T사에서 내놓은 립스틱도 10대에게는 비싼 개당 1만2,000원선이지만 초콜릿향이란 점에서 가장 즐겨 찾는 선물이 됐다. 예쁘게 포장한 남녀용 반지 한쌍과 속옷세트도 10대를 비롯한 젊은층의 선호품목이고 2만원선인 머리띠와 고가의 외제 스카프 등 액세서리 특선품도 인기를 끌고 있다.
서울 시내 주요 호텔도 레스토랑과 나이트클럽에서 젊은층을 겨냥한 특선행사를 마련해 놓고 판촉경쟁을 벌이고 있다.
서울 리츠칼튼 호텔 나이트클럽에서는 「발렌타인 데이」에 40년대식 복고풍 테마파티를 연다. 은빛색으로 실내를 꾸미고 종업원의 의상도 턱시도로 통일시킨다. 레스토랑에서는 14일에 한해 연인들을 위한 특선메뉴와 특선 칵테일을 선보인다. 인터컨티넨탈호텔은 여성고객에게 장미꽃을 무료로 나눠주며 스위스그랜드호텔은 입장한 여성에게 무료칵테일을 선사한 뒤 댄스경연대회를 열어 1등 커플과 가장 박수를 많이 받는 커플에게 상품을 제공한다.
호텔 롯데는 획일적인 초콜릿 상품의 판매량이 매년 감소하자 초콜릿 종류와 장식, 소품 등을 소비자 요구에 따라 꾸며주는 「내가 만든 선물 바구니」를 개발해 내놓았다. 장식과 소품이 고급이어서 10대에게는 과소비일 수 밖에 없다.
Y(19)군은 『호텔마다 특별행사를 개최하니 이날 여자친구를 나이트클럽 등에 데려가지 않으면 관심이 없는 것으로 오해한다』며 『장사꾼들이 앞장서서 분위기를 이끌어 가니 어쩔 수 없이 끌려가게 된다』고 말했다.<염영남 기자>염영남>
◎전문가 진단/소비조장 사회분위기 먼저 고쳐야/구매원칙 없는 10대들 상업전략에 그대로 노출
청소년문제 전문가들은 10대 과소비문제에 대해 『소비를 조장하는 사회 분위기, 그중에서도 10대의 소비욕구를 자극하는 상업전략이 무분별한 소비행태를 가져 왔다』고 진단했다.
YMCA 이승정 청소년사업부장은 『10대의 소비가 예전같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며 『10대들이 필요에 의한 구매를 하는 게 아니라 소비자체를 즐거움으로 받아 들이고 있는 것이 문제』라고 말했다. 어른들은 나름대로 소비원칙이 있지만 10대들은 매스미디어의 영향에 그대로 노출돼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소비자보호단체 협의회 곽정자 소비자상담국장은 『10대의 충동구매나 과소비는 부모나 사회분위기 탓이 크다』고 진단했다.
수원대 철학과 이주향 교수는 10대 과소비의 원인을 가족중심축의 이동에서 찾았다. 1, 2자녀 가정이 보편화하면서 가족중심축이 부모로부터 아이에게로 넘어가 「내 아이는 남과 다르게 키운다」는 엉뚱한 생각이 만연한 반면 애들은 자기 중심을 잡기도 전에 소비를 부추기는 대중매체에 노출돼 상업전략에 휘둘리게 된다는 것. 또 10대를 겨냥한 광고가 끊임없이 소비충동을 부추기는 「1등 공신」이라는 것이 이교수의 분석이다. 그는 『어떤 물건을 샀느냐에 따라 놀이집단이 구분될 정도로 10대의 소비행태는 심각한 상황』이라며 『사회분위기가 달라지지 않는 한 10대 과소비의 불길을 잡을 수 없을 것』이라고 내다 봤다.
연세대 부설 인간행동연구소 연구원 김인경씨는 『10대는 급변하는 사회를 따라가지 못하는 부모를 더이상 정보제공자나 준거틀로 삼지 않고 오히려 또래집단에서 많은 것을 배우게 된다』며 『대중매체의 인기스타와 유행으로부터 민감하게 영향을 받는 것도 이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갑작스런 경제적 풍요로 기성세대조차도 무분별한 소비행태를 보이며 흔들리고 있다』며 『사회운동적 차원에서 구조적 변화를 통해 새로운 가치체계 정립을 모색해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이진동 기자>이진동>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