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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대통령의 자기모순(장명수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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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대통령의 자기모순(장명수 칼럼)

입력
1997.02.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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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법 안기부법의 변칙처리에 이어 터진 한보철강 부도사건은 세계 뉴스시장에 한국의 악명을 되살리고 있다. 국회의 날치기 법안 처리, 권력형 부정부패, 신기루처럼 치솟던 대재벌의 갑작스런 붕괴는 오랜 세월 서울발 외신의 단골 메뉴였다. 개혁을 부르짖어온 김영삼 정권에서 되풀이되고 있는 같은 사건들은 한 나라가 근본적으로 변화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말해주고 있다.변화의 어려움, 개혁의 어려움을 가장 잘 꿰뚫어 본 사람은 한보그룹의 정태수 총회장이었다. 권력을 잡은 사람들의 행태는 여간해서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6공때 수서사건으로 몰락의 위기를 겪었던 그는 김영삼 정권아래서도 권력자를 매수하는 같은 수법으로 승승장구했다. 대통령이 기업의 돈을 한푼도 안받겠다고 강조하건 말건 『돈 싫어하는 권력자 없다』는 그의 생각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누구에게 돈을 주었는지 결코 누설하지 않는다는 「자물쇠」라는 튼튼한 별명으로 매수자들을 안심시키기까지 했다.

김영삼 대통령의 신념, 개혁에 대한 생각은 무엇이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대통령이 부정한 돈을 안받겠다고 선언하면 다른 사람들도 안받을 것이고, 나라를 위한 일이라면 무리한 방법을 써도 괜찮고, 국민은 끝없이 자기를 좋아할 것이라고 그는 믿었던 것 같다. 한국의 정치판에서 한평생을 살아온 사람으로서는 가질 수 없는 순진한 낙관, 민주주의에의 열정과 반민주적 타성의 혼돈, 법치위에 오래 군림한 인치, 자기모순을 깨닫지 못하는 근거없는 자신감이 오늘의 난국을 가져온 직·간접의 원인이다.

노동법 등의 변칙처리와 한보사태 이후 김대통령의 인기가 걷잡을 수 없이 추락하고 있는 것은 그의 언행에 대한 국민의 혐오감이 폭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상하이(상해)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받은 문민정부, 제2의 건국, 인사가 만사, 역사 바로 세우기, 나는 한푼도 받은 일이 없다…. 그가 거듭 거듭 강조해온 요란한 말의 잔치에 비해 오늘의 현실은 너무나 참담하다.

대통령이 신뢰와 지지를 잃고 있다는 것은 사태의 수습을 더욱 어렵게 하고 있다. 자기모순을 깨닫지 못했거나 자기모순에 한없이 너그러웠던 대통령의 국정운영과 안이한 낙관은 스스로를 함정에 빠뜨리는 결과를 빚었다. 그는 측근들을 단속하지 않았고, 기업으로부터 돈을 안받는 정치판이 어떻게 그처럼 윤택하게 돌아가는지 의문을 갖지 않았고, 과거의 TK(대구·경북)정권을 능가하는 PK(부산·경남)정권을 구축했고, 날치기 법안통과를 서슴지 않았고, 당을 사당화하여 비판력과 자생력을 죽였다. 그 모든 일들이 「문민정부」라는 드높은 자부심 아래 행해졌다.

많은 국민은 이제 대통령이 콩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시큰둥하고, 「대통령의 후배들」로 가득찬 검찰이 아무리 공정수사를 강조해도 믿을 마음이 없다. 김대통령에게 지금 가장 시급한 일은 자기모순을 인정하고, 그 모순을 혁파하는 것이다. 자기모순을 그대로 둔채 사건 관련자들을 엄벌하는 것으로 난국이 수습된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그동안 위기에 빠질 때마다 구사해 온 「정면돌파」와 「깜짝 쇼」에 대해서는 국민이 식상한지 오래다. 국민 앞에 백기를 들고 이해와 협조를 구하는 것 이외에 그가 선택할 카드는 남아있지 않다.

노동법과 안기부법의 변칙처리를 백지화하고, 야당의 국정조사 요구를 즉각 받아들이고, 국민이 검찰을 믿지 못하겠다면 특별검사제를 적극 검토해야 한다. 법치 위에 군림했던 인치를 거두고, 그 자신이 법 아래로 내려가야 한다. 대통령의 권위로서가 아니라 법의 권위로 개혁을 하고, 부정부패를 뿌리뽑아야 한다. 대통령의 결단이 아니라 법의 결단으로 국가질서를 세우려고 했다면, 독선과 아집을 버리고 좀 더 겸손했다면, 오늘 그의 처지가 이처럼 고단하지 않을 것이다. 시간이 없다. 대통령은 자기모순부터 정리해야 한다.<이사 편집위원·도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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