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널브러진 장비… 일손 놓은 사람들/한보 당진제철소 공사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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널브러진 장비… 일손 놓은 사람들/한보 당진제철소 공사현장

입력
1997.02.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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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대출 등 정부지원책도 역부족/2,000여 하청업체 공사중단/B지구 7,500근로자중 200여명만 남아한보철강 당진제철소 건설현장. 곳곳에 널브러진 철골재와 앙상하게 드러난 파일, 멈춰 서 있는 포크레인 불도저 페이로더, 삼삼오오 모여 담배를 피우거나 족구로 시간을 떼우는 근로자들….

약 120만평의 부지에 세계 최대의 제철소를 짓는 현장에 달라 붙었던 2,000여 중소업체들이 한보사태로 일제히 손을 놓아 버려 공사가 계속중인 곳은 채 10곳도 안될 정도다. 한보철강 발행 어음을 담보로 한 긴급대출 등 정부의 지원책도 현장의 분위기를 되돌리기에는 역부족인 느낌이었다.

열연 제강 제선공장과 발전소가 들어 설 B지구 공사현장에는 하루 7,500여명의 근로자가 북적댔으나 지금은 기본 인원 200∼300명만이 자리를 지키는 썰렁한 분위기였다. 코렉스 시설공사 등 일부 공사가 진행되고 있는 곳도 안전사고시 (주)한보가 책임질 처지가 아니어서 근로자를 독려하는 업체는 찾아 볼 수 없었다.

B지구에서 설비 및 철물공사를 맡고 있는 중진건설도 기능인력 110명이 해산하다시피 했다. 중진건설 김석기 현장소장은 『공사중단으로 생계가 막막해진 일용직 근로자들이 다른 일거리를 찾아 떠나 버려 대기중인 인력은 손가락으로 셀 정도』라고 말했다. H개발 작업 인부 김모씨는 『건설에 참여했던 하청업체들이 하나둘 짐을 싸 들고 철수해 임시막사도 비어 있는 곳이 많다』고 귀띔했다.

여느때 같으면 선적·하역작업으로 바빴을 지게차도 하나같이 서 있었다. 지게차 20여대를 보유한 「충남지게차」는 운전기사 4,5명만 숙소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충남지게차 소속 차주 김성웅씨는 『작년 10월부터 올해 1월까지 미수금액이 2억원이나 된다』며 『차주들이 할부금조차 제대로 못낼 지경에 이르렀다』고 하소연했다.

한보철강에서 나오는 철강제품을 인천이나 일반대리점으로 실어 나르는 17개 운송업체도 개점휴업 상태. 이들 업체들이 입주해 있는 콘센트 건물에서는 연일 운송업체 직원과 운송비를 받지 못한 지입차주들과의 실랑이가 끊이지 않고 있다.

이들 운송업체들이 (주)한보철강판매에 물려 있는 미수금은 지난해 12월분과 올 1월분 등 약 90억원. 1대당 적게는 100만원에서 많게는 1,000만원이 넘는다. 더욱이 한보철강판매가 발행한 어음으로는 채권 확인서마저 받을 수 없어 대출이 불가능하다. 화전상운 소속 차주 김완중씨는 『두달치 운송비 1,200만원을 받지 못하는 바람에 차 할부금 3개월치 600만원이 밀려 보증인 재산압류통고를 받았다』며 『지입차이기 때문에 매달 운송비를 받지 못하면 당장 빚을 지게 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문제가 된 코렉스 설치공사도 일부 작업만 이뤄지고 있었다. 공사를 맡은 한라건설측은 외국기술자가 와 있어 하청업체에 공사를 독촉하고 있지만 작업은 지지부진하다. 냉연공장 도금설비와 제강공장의 전기로 설치, 탈가스 설비, 수처리 시설을 현대중공업으로부터 하청받은 보명플랜트 등 5개업체는 남은 공정 계약이 어떻게 될지 몰라 아예 일손을 놓아 버렸다.

당진제철소 A지구 전기로는 굴뚝에 연기를 피워 올리고 있었으나 덩그러니 남은 철근 더미가 을씨년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당진 지역경제가 꽁꽁/못받은 각종 외상값 900억원/실직한 주민 3,000여명 “하루빨리 공사 재개돼야…”

한보사태는 한보왕국 당진의 분위기를 일순간에 바꿔 버렸다. 한보철강의 침몰로 당진 지역경제 전체가 흔들리고 있는 것. 안 그래도 전반적인 경기침체와 올 1월 두산음료공장의 폐쇄로 위기에 몰려 있던 당진 지역경제에 한보한파는 결정타였다.

특히 한보철강이 위치한 당진군 송악면과 인근 송산면 일대의 식당가와 유흥가는 완전 마비 상태에 빠졌다. 지난달 23일 한보부도가 나면서 음식점 단란주점 등 100여 영세상인들은 대부분 문을 닫아 걸었다. 당진제철소 건설현장에서 일하던 고객의 발길이 뚝 끊겼기 때문이다. 당진읍내 상권도 밤 9시 이후에는 인적이 거의 끊어 진다.

한보부도 직후 휴업한 송악면 신영남식당 주인 김완주씨는 『부도나기전까지 한보철강 주변 음식점은 밤 12시까지 흥청거려 잠을 못잘 정도였다』고 말했다.

문을 연 몇 안되는 음식점 가운데 하나인 승보식당 주인 박승례(여)씨는 『평소 점심시간때면 15∼30분씩 기다려야 할 정도로 붐볐는데 하루아침에 이지경이 됐다』며 『하루 매상이 20만원은 넘어야 현상유지가 되는데 손님들의 발길이 뚝 끊어졌으니 막막하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박씨는 『정부가 돈을 풀었다는데 하청업체에 대한 운영자금 지원이 없어 외상회수도 되지 않고 있다』고 덧붙였다.

당진제철소 B지구 공사에 참여한 중진건설 관계자는 『한보 부도 전까지만 해도 삽교천을 지나 서울에 가거나 서울에서 오는데 5, 6시간 걸렸는데 지금은 2, 3시간 정도로 줄었다』고 말했다. 그만큼 오가는 차량과 인부들이 줄었다.

설 연휴 직전인 6일까지 당진군청이 집계한 이 지역 피해액은 900억원대. 공사비는 말할 것도 없고 식대 숙박료 차량수리비 부품대금 인쇄 및 신문대금을 어음으로 받거나 외상을 준 음식점 인쇄소 골재납품업체 주유소 레미콘업체 제조업체 등을 망라해 구석구석까지 피해가 미쳤다.

당진 기업인협의회 최치운 사무국장은 『한보부도직전까지 당진제철소에서 일하던 7,500여명중 절반가량이 당진지역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대부분이 일자리를 잃어버린 상태』라며 『하루빨리 공사가 재개돼야 지역경제가 살아날 수 있다』고 안타까워 했다.

◎하청업체 명·암/대기업 하청업체는 자금회전 정상/한보와 계약·직거래한 업체는 ‘죽을 맛’

한보철강 당진제철소에 골재 등 원자재를 납품하거나 기초·토목공사를 맡은 협력·하청업체들은 죽을 맛이다. 한보계열사로부터 받은 어음이 돌지 않아 부도위기에 몰리면서 지난해 12월치부터 임금을 지급하지 못하고 있다.

이들 업체 사장과 임원은 10일에도 부도난 어음을 들고 「채권확인서」를 발급받아 은행 대출을 받으려고 자금관리단과 이 은행 저 은행을 찾아 다녀야 했다.

이런 와중에서도 일부 중소기업은 느긋하다. (주) 한보가 발주한 당진제철소 공사에 참여하고 있는 한국중공업 현대중공업 한라중공업 삼성중공업 효성그룹 코오롱건설 등의 하청업체들.

한국중공업 등은 한보로부터 받은 5개월짜리 어음 때문에 수백억원이 묶여 있지만 하청업체의 공사·납품대금을 100% 현금 결제했다. 2개월짜리 어음을 건네는 경우도 있지만 자체자금으로 기한이 닥친 어음을 막을 수 있어 이들 하청업체의 자금회전에는 문제가 없다. 결국 대기업 밑에 들어 간 하청업체에는 한보사태의 파문이 거의 미치지 않고 있다.

한라건설 하청업체로 제철소 코렉스설비 공사에 참여하고 있는 (주)산야건설 현장사무소 이준모 소장은 『공사 대금이 정상적으로 지급돼 자금사정이 괜찮아 임금체불도 없다. 모든 계약이나 거래를 직접 한라건설과 행하고 있어 아직까지 한보사태의 영향은 없다』고 말했다.

현대중공업측도 하청업체인 성림기계 대정기계 주경기공 등 5개 전문설비업체에 납품·설비대금을 제때에 현금으로 지급했다. 현대중공업 당진제철소현장 조종현 총괄소장은 『우리도 몇백억원이 물려 있지만 하청업체에는 현금결제를 해 왔기 때문에 한보와 계약하거나 직거래를 한 중소기업과는 사정이 다르다』고 설명했다. 이들 대기업 하청업체는 설연휴 이틀전부터 직원들에게 상여금을 쥐어 주고 귀성행렬에 동참하게 하는 등 여유를 보였다.

또 정부의 자금지원 대책이 한보철강 위주로 이루어지는 바람에 한보철강이 발행하거나 배서한 어음을 소지한 중소기업과 다른 한보 계열사나 협력업체의 어음을 받은 하청업체 사이에도 명암이 엇갈리고 있다. 한보철강 발행 어음을 가진 중소기업은 채권확인서를 받기만 하면 은행을 찾아 가 어떻게든 급한 자금을 대출받을 수 있다.

반면 (주)한보철강판매 (주)한보에너지나 협력업체가 준 어음을 갖고 있는 중소업체는 채권확인서마저 받을 수 없는 형편이다.<이진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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