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가담보 요구·대출기피에 급전으로 연명하는 하루하루/정부선 지원책 요란하지만 은행은 여전히 ‘강건너 불구경’/부도의 어두운 그림자는 하청에 재하청업체로 꼬리를 잇고…한보 부도사태 수습을 위해 (주)한보철강공업 당진제철소에 설치된 은행관리단 사무실. 작업복 차림의 (주)기흥기계산업 직원 3명이 은행관리단 직원들을 만나 사정사정하고 있었다. 이들의 애절한 눈빛은 한보사태로 인한 협력·하청 업체의 연쇄도산 위기가 얼마나 심각한 지를 그대로 보여 주고 있었다.
「특혜대출 5조원」 「비자금 2조원」 등 천문학적인 숫자가 사람들의 입에 거침없이 오르내리고 있는 사이 한보에 목을 매달고 있던 중소기업들은 수억원, 아니 수천만원이 없어 벼랑끝으로 내몰리고 있는 상황이 피부에 와 닿는 현장이다.
기흥기계산업은 (주)한보로부터 받은 진성어음과 채권을 이달 초 신고·확인하고 은행에 대출을 신청했지만 거절당한 터였다. 열흘 가까이 현지에서 숙식하며 회사의 사활을 걸고 동분서주했지만 은행은 『본점으로부터 대출 지침을 시달받은 바 없어 불가능하다』며 『기다려 보라』고 늘 같은 대답이었다.
은행대출을 신청하려고 모여 든 다른 중소협력업체들과 정보를 교환해 보지만 대책이 없기는 마찬가지. 은행은 오히려 추가 담보설정을 요구하며 예금을 동결했고 할인해 주었던 어음에 대해서도 환매요구를 내놓았다. 책상머리에서 나온 정부대책 따로, 은행 따로인 현실에 분통이 터지지만 꾹참고 어떻게든 대출을 받아야 한다.
기흥기계산업의 한보관련 피해액은 어음 53억여원과 미수금 약 117억원 등 170억원에 이른다. 대부분이 B지구 공사대금이다. 이중 한보철강과 (주)한보와 직거래한 64억원을 제외한 나머지 어음이나 채권은 종이조각이 될 지도 모른다. 아직 부도가 나지 않은 한보그룹 계열사 (주)승보철강과 (주)한보철강판매가 배서한 어음과 채권 105억여원은 그나마 확인대상에서 제외됐다.
한보철강 관련 진성어음을 담보로 한 은행의 즉각대출 방침을 정부가 서둘러 내놓은 것도 아무런 위안이 되지 않는다. 한보철강 발행 어음은 겨우 8,000만원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93년 당진제철소에서 소규모 제철설비를 맡아 한보와 인연을 맺은 기흥기계산업은 총매출의 95% 이상을 한보계열사가 차지할 정도였다. 지난해말 공사대금이 제때 지불되지 않아 자금압박을 받기 시작하더니 1월말 한보철강 부도 이후에는 회사의 명운이 위태로워졌다. 70여개에 달하는 하청업체들로부터 대금을 지불해 달라는 요구가 봇물처럼 터져 나오고 있다.
현장 생산관리부장 김정동씨는 『며칠내에 어음할인과 대출이 이뤄지지 않으면 부도가 날 수 밖에 없는 처지』라며 『우리회사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8개 협력업체와 30여개 영세업체들도 연쇄도산할 수 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기흥기계산업에 유압기기를 납품하는 종업원 10명 규모의 하청업체 흥용산업도 자연히 위기를 맞았다. 총공사비 4억여원 가운데 기흥기계산업으로부터 받아야 할 압연 및 파이프라인 공사비 1억여원을 아직 못받고 있다. 직원들을 놀릴 수 없어 평소의 80% 수준으로 조업을 단축했지만 자재대금을 제때 내지 못해 자재조차 구할 수 없는 실정이다.
종업원 월급도 12월분부터 밀려 있어 설날 상여금은 꿈도 꾸지 못했다. 사장 이근용(38)씨는 『자금회전이 안돼 수금이 쉽지 않은 데다 한보관련 업체라는 소문이 돌면서 사채마저 끊어져 버렸다』며 『이달중으로 대금을 받지 못하면 공장문을 닫아야 할 처지』라고 하소연했다.
제강정련제(플럭스) 제조설비를 맡은 기계설비회사 (주)원강플랜트도 사정이 딱하기는 마찬가지다. 약 56억원의 연매출액 가운데 (주)한보의 공사액이 53억원을 차지할 정도여서 한보사태 충격파에 휩쓸렸다. 지난해말 중간 공사대금 20억원을 어음으로 받았지만 은행에서 할인받기 직전 한보사태가 터져 자금줄이 막혀 버렸다. 맡은 공사의 95%가 끝난 상태지만 미수금 30억원은 언제 어디서 받아야 할 지 기약이 없다.
산하 59개 하청업체는 연일 결제를 요구하는 전화를 하고 있지만 운영자금조차 구하기 어렵다. 하청업체 관계자들을 불러 대금지불을 약속하고 영세업체들에게 대금일부를 지불해 줬지만 하청업체들의 불안감을 지우기는 역부족이다. 사장 박제순씨는 『온집안 식구들을 동원, 사채와 급전을 구해 어음과 납품대금을 막고 있지만 앞으로 한달 이상은 버티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원강플랜트의 하청업체 삼화샤링도 잇단 원청업체 도산으로 흔들리고 있다. 철판 절단·가공 전문업체로서 연매출액 5억원의 소기업인 삼화샤링은 1월 들어 원청업체 2개가 도산하고 원강플랜트를 비롯한 다른 원청업체도 언제 쓰러질 지 몰라 발을 구르고 있다.
원청업체 S보일러가 1월 중순 도산한 데 이어 연매출액 300억원대의 대형업체인 S정밀마저 1월말 부도가 났다. 3,000만원의 미수금을 받을 길이 막막해 졌다. 원강플랜트를 찾아가 대금 2,000만원의 일부라도 달라고 호소해 보았지만 어떻게든 운영자금이라도 돌려 주려는 사장의 태도에 더이상 독촉하기가 민망할 지경이었다. 이기욱 자금과장은 『당장 직원들 임금지급도 힘든 상태』라고 말했다.
당진제철소 A지구 건설현장의 원강플랜트 하청업체인 혁재기공. 플럭스 저장탱크 24기중 4개를 완성하고 대부분 마무리 용접만 남겨놓은 상태지만 인력과 자금부족으로 거의 공사가 진행되지 않고 있다. 더욱이 저장탱크 부지를 담보로 잡은 은행이 시설허가를 내주지 않아 공사자체를 중단해야 할 지경이다. 박진우(44) 현장소장은 『직원들 동요를 막기 위해 작업은 계속하고 있지만 자금회전이 안돼 설날 상여금도 못 줬다』며 『노무자들이 일손을 놓고 불안해 하고 있다』고 말했다. 현장노동자 안규복(38)씨는 『15일에 나와야 할 급여가 말일에 나오는 처지여서 설에 집에도 가지 못했다』며 『한보 때문에 8년간 일해 온 직장이 위험에 처해 있고 생계까지 타격을 받게 돼 억울하다』고 울분을 토했다.<배성규 기자>배성규>
◎대출애환의 산증인 중기자금부 사람들/때론 고양이 앞의 쥐처럼 때론 포커판의 도박사처럼/눈물·협박… 갖가지 해프닝
평소 중소기업에 대해 그렇게 짤 수가 없었던 은행대출이 한보사태의 여파로 아예 얼어 붙으면서 중소기업 자금부 사람들은 「죽을」맛이 돼 버렸다.
돈을 구해 오라는 회사의 명령은 득달같지만 은행을 상대하기는 더욱 어려워져 여기저기서 발을 구르고 있다. 「엄동설한」을 넘기기 위한 자금부 사람들의 성공담은 중소기업에 유난히 문턱이 높은 금융계의 체질이 빚은 한 편의 블랙코미디를 연상시킨다.
H기업 자금부의 L과장은 이달초 급하게 2억원을 빌려 오라는 회사의 지시를 받았다. L과장은 평소 잘 알고 지내던 A은행 대출담당 K씨에게 저녁을 대접하겠다고 전화를 해 명동의 한 식당에서 만났다. K씨는 평소 H사에 대해 『담보가 부실하다』며 짜게 굴었던 터였다. L과장은 식사전부터 K씨의 말투로 미루어 정상적으로 돈을 빌리기는 틀렸다고 직감했다.
L과장은 밥이 나오자 소주 한병을 공기밥에 쏟아 부은 뒤 말아 먹기 시작했다. K씨는 『밥을 술에 말아먹다니…』라며 질겁했다. L과장은 이때다 싶어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라며 『나도 목이 날아갈 판이니 딱 한번만…』이라고 부탁했다. L과장의 전략은 K씨의 동정을 샀고 「소주밥」을 다 먹어갈 때쯤 대출약속을 받아낼 수 있었다.
S기업 자금부의 J대리는 대출을 위해 연극을 한 경우. J대리는 수억원의 대출을 받기 위해 같은 부서의 P과장과 작전을 짠 뒤 B은행 대출담당 K씨를 술자리로 불러 냈다. J대리는 술이 거나하게 취하자 『대출을 좀 해 달라』고 요청, K씨가 『곤란하다』고 말하자 각본대로 행패를 부리기 시작했다.
J대리는 『이제 당신과도 작별이다. 어차피 회사는 그만둬야 하지만 그전에 당신 윗사람에게 할말이 좀 있다』고 은근히 협박하는 사이 P과장은 J대리를 준엄하게 꾸짖기도 하고 달래기도 했다. 평소 사람 좋기만 하던 J대리의 갑작스런 태도에 당황한 K씨는 J대리에게 『그렇게 사정이 어려운 줄 몰랐다』며『회사에 건의해 대출이 되도록 해 보겠다』고 약속했다.
거래은행의 담당 임원을 찾아 가 무릎을 꿇고 『살려달라』며 우는 「읍소형」은 비교적 흔한 편이다. I제약 자금부의 L과장은 『자금부 사람들은 누구나 상황이 좋지 않을 경우 읍소할 각오가 돼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회사가 정말로 급박한 위기를 맞았을 때 그들은 오히려 포커 페이스가 돼야 한다. 다 죽어가는 표정을 보였다가는 은행에서 회사의 도산을 피할 수 없는 것으로 보기 십상이다.<조재우 기자>조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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