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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함 큐브릭’으로 돌아온/김이태,그 작가적 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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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함 큐브릭’으로 돌아온/김이태,그 작가적 광기

입력
1997.02.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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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툭툭 내뱉듯 몸통만을 말하는 문체/인간의 허무에 대한 천착/변두리 뮤지션 남매의 숨막히는 듯한 삶이 뭔지모를 불협화음을 남기는 ‘헤비메탈’ 같이 들린다소설가 김이태(32·여)씨의 글에서는 어떤 광기같은 것이 느껴진다. 숨이 찬다.

그러나 그에게는 오랜 만에 찾은 한국 땅이 오히려 더 숨이 턱턱 막히도록 미쳐 돌아가는 곳이었다. 「전쟁통 같은, 늘 비등점에 있는 것처럼 악랄하게 사는 삶」 이것이 첫 장편 「전함 큐브릭」(고려원간) 출간차 돌아온 그에게 비친 이 땅에서의 삶의 모습이었다. 「버릴 수 없는 인간의 심성, 이것으로는 살 수 없으니 그 바깥을 가리는 현실 논리를 따로 또 하나 마련해야 하는 이중적 인간들이 사는 이중 구조의 사회」이다.

한국을 떠나 있음으로 그는 그 현실을 오히려 더 잘 볼 수 있었다. 그는 소설에서 그 현실을 직접적으로 다루지는 않는다. 다만 치사량의 수면제를 초콜릿처럼 집어먹고 세상에서 「자연도태」되려 하거나(「전함 큐브릭」), 남자의 정액을 마신 뒤 「식성」이 달라져 절간으로 들어가 버리는 여자(「식성」) 등 작중 인물들의 의식과 무의식을 통해 드러낼 뿐이다. 그 현실은 우리가 늘 대면하는 것보다 훨씬 생생하다.

「전함 큐브릭」. 「대낮이라도 뿌연 대기 아래 밀집해 있는 아파트 단지… 숱하게 사나운 인생들이 네모난 작은 공간 속에 똬리를 틀고 있는」 그것이 그가 말하는 전함의 모습이다. 큐브릭은 「영화감독 스탠리 큐브릭의 이름이라도 좋고 그저 네모나고 반짝거리는 어떤 발광체」라도 좋다.

한 살 차 나는 오누이인 익희와 애자. 오빠는 「더 이상 이 세상의 주인이 아니라는 데에 대한 밀려난 자의 분통」과 「이미 시야를 벗어나기 시작한 사물들에 대한 배반감」으로 피아노를 두들겨대는, 카페 등 업소를 전전하는 악사이다. 『도대체 무언가를 이해한다는 것이, 아니 그것보다 무엇인가를 이해하려고 하는 태도부터가 삶으로부터 멀어지는 거야』라고 세상을 배워갈 수 밖에 없는 동생 애자는 위장결혼으로 3년간 일본에 가 있다 아이 하나를 안고 돌아온 대중 가수. 이들 변두리 뮤지션과 익희의 친구 윤수, 작사가 황보 등 6명의 주인공들이 맺어가는 상호관계가 소설의 내용이다.

소설은 결코 쉽게 읽히지 않는다. 툭툭 내뱉는 듯, 거두절미하고 몸통만을 말하는 문체―결코 여성적(?)이지 못한 그의 문체 때문이기도 하고 이야기의 밑바닥에 흐르고 있는 허무적 주조 때문이기도 하다. 소설가 이제하씨는 이런 그의 글을 「헤비메탈을 닮은 불협화음」이라 말한다. 『전자, 드럼, 기계, 육성 등 여러 복합음들이 제각기 어둡고 비관적인 자기 주장으로 주위를 원인 모를 열에 떠 부풀게 하고, 끊임없이 마찰, 중복, 교차해 꿈틀거리면서 강렬한 비트를 남기는 그런 양상』이라는 것이다.

30살의 나이에 등단해 마치 그간 쓰지 못한 것을 보상받기라도 하겠다는 듯 2년도 채 안돼 두편의 장편소설과 작품집으로 묶을 수 있는 분량의 중·단편들을 토해 놓은 소설가. 『학력고사 점수 때문에』 서울대 의대로 진학했다 포기하고 철학과로 다시 들어가 졸업했다. 자신의 소설 제목 「궤도를 이탈한 별」 처럼 90년 무작정 한국을 떠나 남미의 페루로 갔다. LA를 거쳐 이제 고향 부산과 가까운 일본의 키타큐슈까지 와서 대학원에서 비교문학을 전공하며 한국을 한발 떨어져 바라보고 있는 김씨.

문학평론가 장은수씨는 『인간의 고독에 대한 김씨의 천착은, 반드시 나왔어야 했을 90년대 우리 소설의 중요한 수확』이라며 『그는 80년대 후반 학번의 내면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는 작가』라고 말했다. 그 학번의 의식의 기저에는 이런 것이 있다. 「딱 3년이었다. (거대한 이데올로기적 영향력이) 썰물처럼 사그라져 갈 때 나는 멍한 눈빛을 감출 수 없었고 자꾸만 뒤를 돌아보는 자신을 채근하곤 했다. 끝났어. 완전히… 언젠가는 다시 살아날 이 집요한 낙원에의 열망이 이 세기에는 다시 일어날 수 없다. 나는 아무데나 몸을 던져버리듯 직장을 잡았고 진지하고 고루한 삶의 의미 따위에는 굿바이를 했다」(「식성」중에서).<하종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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