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과 민족문화에 대한 정체성이 부정, 능멸당하는 식민지에서 그림 그리기는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이 점을 고민한 미술가들이 자신에 대한 의문을 무수히 던지는 가운데 많은 자화상을 남긴 것이 아닐까?그런 미술가 중의 하나가 이쾌대(1913∼1987?)다. 그는 중등학교 시절 공모전에 낸 자화상부터, 청소년기의 정열로 쫓아다니던 아가씨와 스무살에 혼인한 뒤 일본으로 유학가 꿈같은 생활을 보내는 그림들, 자신의 내면을 응시하는 듯한 자화상 등까지 모두 10점 가까운 자신의 그림을 그렸다.
「두루마기 입은 자화상」은 말 그대로 『나는 이런 사람이다』라는 확신에 찬 상태를 보여주는 예다. 화가가 입은 짙은 옥색 두루마기 자락이 바람에 벌어지고 고름은 가볍게 날리고 있다. 그러나 물감판과 붓을 쥔 인물은 버티고 선 듯 굳건해 보인다. 짙은 옷색과 더불어 맑고 푸른 하늘을 뒤로 한 중절모가 흥미를 돋운다. 인물상을 둘러싸고 있는 배경은 마을의 모습이다. 그곳은 「보습을 댈 땅과 옷이 있는」 평화로운 조국의 향토다. 화면에서 어두운 표현을 배제해 이런 분위기에 맞추었다.
그는 일제 치하 말기, 문학계의 우리말글 살려내기 운동과 견줄 수 있는 조선신미술가협회 운동을 이중섭, 진환 등과 함께 펼쳤다. 어떻게 유화를 토착화할 것인가에 대한 모색과 운동을 이끌었는데 그의 뒤에는 만능천재의 면모를 지닌 형 이여성의 각별한 관심과 보살핌이 있었다. 사화가라고도 한 화가이면서 독립운동, 문화재 수집, 미술사 연구와 몸치레(복식)연구를 개척하기도 한 그의 이력은 참으로 다채로웠다.
조선조 초상화의 미감을 되살리면서도 병풍 같은 생활미술에 보이는 선연한 채색을 유지하도록 명암을 배제하는 한편, 붓까지 고안해가면서 탐구를 거듭한 이쾌대의 노력 뒤에는 그의 형의 가르침이 컸다. 그는 형의 도움과 여운형과의 건국동맹 활동을 통해 되찾을 나라의 새로운 문화를 모색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자화상은 해방 전 또는 그 후, 민족 독립의 감격 아래에서 제작하였을 것이라 여겨진다. 그리하여 이 그림은 마치 『나는 독립한 민족(또는 나라)의 화가다』고 외치는 것 같다.
이쾌대의 그림이 40여년 만에 공개된 91년, 사람들은 비로소 한 사람의 거장이 숨겨져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파행을 거듭한 근대사의 궤적 속에서 어떻게 이런 거작(한 변이 2m가 넘는 대작도 여러 점이다)이 가능했는지, 이런 탁월한 화가가 왜 숨겨져 있어야만 했는지 하는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그는 「월북자」였던 것이다. 유족들의 각고의 노력 끝에 「해금」됨으로써 비로소 그의 작품은 오랜 세월 후 우리 앞에 다가섰다.<최석태 미술평론가>최석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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