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강 얼음 위에 죽어 나뒹군 독수리가 22마리나 됐다. 입춘인 4일 아침 신문에 나온 불길한 소식이다. 떼죽음 당한 독수리는 우리나라 천연기념물 243호라고 한다.얼마 전에는 철새 도래지인 주남 저수지에서 갈대밭이 불타는 일도 벌어졌다. 갈대밭이 사라지면 새들은 찾아들 자리를 잃는다. 이 땅을 버리고 떠나야 한다.
임진강에선 독극물이, 주남 저수지에선 불길이 새들의 생존을 뺏고 위협한다. 새들은 이리저리 쫓겨다니고, 그러다가 더러는 절멸하기도 할 것이다. 새들을 못살게 구는 이 땅은 새들에게는 참으로 「힘든 나라」다.
그러나 사실은, 새들만 살아가기 힘든 땅이 아니다. 사람들은 더 힘든다. 새해가 시작된지 겨우 한달 남짓인데, 이번에는 부도 낸 재벌 하나가 온 나라를 강타하고 있다. 노동법 등 날치기 파동과 총파업사태에 뒤이은 것이어서, 사람들은 제 정신을 찾기도 힘들다. 어디서 무엇이 어떻게 잘못되어 어디로 흘러가는지 종잡을 수가 없다.
힘든 사람들 가운데는 김영삼 대통령도 있다. 미국의 워싱턴 포스트는 1일자에서 세계 주요국 지도자들의 자국내 지지도를 비교했는데, 한국의 최고지도자는 지지도 17%로, 비교대상이 된 12국중 11위였다고 한다. 12위는 러시아의 옐친 14%이고, 1위는 남아공 만델라 88%, 2위는 미국 클린턴 60% 등이다.
국내에서 최근 시행된 어느 조사에선 한자릿수의 지지도가 나와 충격을 보탰다고 한다. 스무날 뒤인 25일이면 대통령취임 4주년인데, 이런 상황은 취임 초기의 하늘 찌르던 인기에 견주면 도무지 말씀이 아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는지 가슴에 손을 얹을 일이다.
경제가 위기국면인 것은 분명하다. 외채누적, 경상적자가 기록적인 숫자로 치솟는데다 총파업, 한보사태가 겹치면서 대외신인도 마저 추락하고 있기 때문이다. 돈꾸어쓰기도 쉽지 않은 상황으로 몰린다면, 그런 OECD회원국은 이름이 부끄러울 뿐이다. 한보가 그러했던 것처럼, 최고경영자의 독선과 경영실패는 한 나라의 미래도 파국으로 몰아갈 수 있음을 보여준다.
사태가 이러한데, 한보사태가 불거지면서 정치권이 벌이기 시작한 언어폭력은 지켜보는 국민을 절망에 빠뜨릴 만큼 유치한 수준이다. 그 공소한 수작의 연속이 사람들을 참기 힘들게 한다. 상대방에게 상처를 입히는데만 열중하는 정당 대변인들의 「성명서 전쟁」은 우선 그 격이 천박한데 심각성이 있다. 위기의 본질을 거론하기보다 헐뜯고 음해하고 협박하는 것으로 일관하는 그 야비함이야 말로 이 땅에서 독수리를 떼로 살해하고 천혜의 도래지를 불태우는 행위와 어딘가 닮았다. 이런 천격의 사회가 문제다. 경제의 위기는 실물의 위기이지만, 생각의 천박함은 정신의 위기를 가져온다. 이것이 더 위험하다.
4년 전에 「문민정부」라는 말은 국민에게 희망이고 성취의 의미였지만, 지금은 그 뜻이 그렇게 전달돼오지 않는다. 한때 「칼국수」는 감동적인 메시지일 수 있었으나, 지금은 더 이상 감동이 없다. 칼국수의 결벽과 도덕성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 정치상황의 천박함을 응축해서 설명해주는 화두는 지금 「패거리정치」, 또는 PK니 KK니 하는 편가르기 독식이다. 그 풍경화는 근대적 정치의 마당이 아니라 골목 패거리의 사회이며 봉건적 충성심의 세계이다. 그곳은 합리적인 인간관계가 아니라 감성적인 유대관계가 지배하는 구조를 지닌다. 이런 패거리 사회의 구조로는 21세기형의 새로운 정치로 나아갈 수 없다.
김 대통령이 「부정부패의 표본」으로 한보사태를 재빨리 바꿔보기 시작한 것은 다행한 일이다. 한국병을 치유하려던 신한국의 여러 개혁이 어느 틈에 곳곳에 「신한국병」이 되어왔음을 진작 알았어야 했다.
정치는 힘들어 하는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행위여야 한다. 적어도 감동을 주려고 노력하는 과정이어야 한다. 우리 사회의 모든 천박함을 쓸어버리고 인간적인 감동을 창출하는 정치, 한단계 나라의 격을 높이는 고급스러운 결단이 있어야 하는 시점이다.<본사 심의실장>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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