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추위에 폭포도 얼고 온통 눈과 얼음꽃/들끓던 관광객도 뜸해 호젓한 여행에 제격한겨울의 나이애가라는 더욱 장엄하다. 나이애가라 폭포는 계절마다 맛이 다르고 또 언제든 그 이름값을 충분히 하지만 겨울폭포는 신비함이 더욱 짙게 배어있다.
깨끗하다. 한 점의 티가 없다. 녹음이 우거진 여름과 현란한 단풍이 물든 가을도 좋다지만, 속세의 온갖 더러움과 담을 쌓은 듯한 도도한 겨울폭포. 폭포 앞에 서면 겸손해질 수 밖에 없지만, 겨울에는 여기에 마음의 때마저 씻겨지는 기분이다. 서푼도 안되는 용기를 과시하기 위해 폭포에 뛰어들려는 사람들에게 나이애가라의 신은 『조물주는 모든 사람에게 충분한 용기를 주었기 때문에 굳이 이를 시험할 필요는 없다』라고 타일렀다 한다.
나이애가라 폭포는 에리호에서 불어오는 차디찬 바람에도 거뜬히 버티고 서있다. 원주민 인디언들이 지어준 거룩한 이름 나이애가라(천둥의 물:Thunder of Waters)답게 우렁찬 소리를 내며 장하게 흘러내린다.
그러나 가까이서 들여다 보면 폭포만 흐를 뿐 주변의 모든 것은 꽁꽁 얼어붙어 있다. 폭포주변에 늘어선 나무들은 눈과 얼음꽃으로 덮여 축 늘어진 가지가 땅에 닿을 듯 하다. 세상 만물을 집어삼킬 듯한 기세로 초당 평균 5,720㎥나 떨어지는 폭포수도 5m를 채 흐르지 못한 채 얼음덩어리로 변한다.
때문에 겨울에는 사람들을 폭포 바로 아래까지 실어 나르는 유람선 메이드 오브 더 미스트(Maid of the Mist)도 꼼짝할 수 없다. 배를 타고 물보라를 헤치며 폭포를 눈앞에서 감상할 수 없는 점이 아쉽다. 그러나 눈과 얼음이 빚어내는 겨울의 나이애가라는 분명 여름보다 위대하고 아름답다.
겨울의 나이애가라는 약간 썰렁하다. 항상 북적거리던 주차장과 레스토랑에도 빈자리가 곧잘 눈에 띈다. 「나이애가라에서 허니문을 즐기는 부부는 폭포처럼 영원히 행복하게 산다」는 전설을 믿고 오는 신혼부부들의 모습도 줄어들었다. 번잡함이 없는 만큼 호젓한 여유가 있다.
아메리칸 폭포로 불리는 미국쪽 폭포는 폭포 아래까지 가야만 제모습을 볼 수 있다. 미국쪽에서 레인보우 브리지만 건너면 캐나다. 나이애가라는 「무지개의 땅」이라는 별명이 붙어있을 만큼 무지개가 자주 뜬다. 폭포의 장관에 무지개가 어우러지는 것을 볼 수 있으면 행운. 모양이 말굽을 닮아 「호스 슈」로 불리는 캐나다쪽 폭포가 더 웅장하며 한 눈에 들어온다.
나이애가라의 밤은 총천연색이다. 캐나다쪽에서 비쳐대는 20가지 형형색색의 서치라이트가 얼음폭포를 수놓는다.
나이애가라를 찾아가는 길도 겨울여행의 진수이다. 뉴욕에서 자동차로 8시간을 달리다 보면 눈덮인 산과 들, 그리고 함박눈을 지천으로 만날 수 있다.
해마다 지구촌에서 1,000여만명이 찾는 세계적 관광명소인 나이애가라는 입장료와 관람료가 따로 없다. 조물주의 선물은 모든 사람들이 자유롭게 즐길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조물주가 인간에게 나이애가라를 선물한 까닭은? 겨울의 나이애가라는 그 답을 주는 것처럼 도도하게 서있다.
◎나이애가라에 도전한 사람들
미국인들은 「목숨을 건 모험을 한다」라는 말을 「Shoot Niagara」라고 말한다. 나이애가라에 뛰어든다는 뜻이다.
그러나 실제로 나이애가라에 도전하는 「간 큰 남자들」의 모험은 끝이 없었다. 샘 패치는 1829년 30m 높이에서 나이애가라 급류에 뛰어들어 살아남았다. 그의 최고 낙하속도는 시속 100㎞였다. 그는 그러나 이듬해 좀 더 난코스에 도전하다 결국 물귀신이 되고 말았다.
프랑스의 잔 그라벨레는 1859년 급류 위에 외줄을 매달고 12m의 장대를 이용해 균형을 잡아가며 18분만에 건넜다. 그는 이후 이 외줄을 자전거로 건넜고 등에 매니저를 업고 건너는 묘기까지 보였다.
보트를 타고 급류를 건너거나 아예 급류를 헤엄치는 사람들도 등장했다. 조엘 로빈슨 등 3명은 1861년 보트를 타고 폭포 바로 밑 급류를 헤쳐나가다 물살에 휘말렸으나, 다행히 목숨은 건졌다. 영국해협을 처음으로 헤엄쳐 건넌 매튜 웹도 나이애가라를 답사한 뒤 자신만만했지만 급류에서 실종돼 나흘 만에 시체로 발견됐다.
웹의 꿈은 그러나 3년 후 윌리엄 캔댈이 실현했다. 캔댈은 구명조끼를 입기는 했지만 웹이 건너려던 코스를 무사히 헤엄쳤다. 1887년에는 캘리슬 그래햄이 2m가 넘는 통안에 들어가 폭포에 뛰어든 뒤 급류를 건너는 데 성공했다. 나이애가라에 도전하다 숨지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1941년부터는 나이애가라에서의 모든 「스턴트」가 법으로 금지됐다. 때문에 윌리엄 피츠제럴드는 1961년 급류에 뛰어들어 살아남았지만 경찰에 체포돼 200달러의 벌금을 내야 했다.<나이애가라 폴스="이종수" 특파원>나이애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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