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니 합작 ‘국민차’로 일본차 아성 격파/신차계약 장사진 연일 경이적 판매기록/현지생산,내년 5만대 2000년 12만대「21세기 기업에게는 국적을 묻지말라」
새해의 흥분이 채 가라앉지 않은 지난달 9일 인도네시아의 수도 자카르타의 번화가 수드리만 거리. 코로라(도요타), 포르사(스즈키) 등 일제차 물결속에 어디선가 새빨간 낯선 승용차 한대가 나타나 일제차 사이를 누비며 질주한다. 거리를 지나는 시민들은 이 차를 볼때마다 「티모르, 티모르」를 외치며 감탄사를 연발한다. 기아자동차가 생산, 공급하는 인도네시아 국민차 「티모르」의 인기는 가히 폭발적이다.
빌딩과 음식점 주변에 주차된 티모르엔 구경꾼들이 몰려들고 자카르타 시내 15개 대리점에는 남보다 먼저 신차계약을 하려는 사람들로 연일 북새통이다.
지난해 10월3일부터 자카르타를 중심으로 본격 판매에 들어간 티모르는 석달만에 판매 7,500대, 계약 7,200대 등 경이적 판매기록을 세우고 있다. 인도네시아의 연간 승용차(지프형차 제외) 판매규모가 3만8,000대인 것을 감안하면 가히 시장을 휩쓸고 있는 셈이다.
그렇지만 이는 기나긴 교향곡의 서곡에 불과하다. 자카르타 인근의 치캄펙지역 73만평 부지에 건설중인 현지공장이 98년 4월 완공되면 매년 5만대의 「티모르」가 거리로 쏟아질 것이다. 2000년에는 스포티지 등 지프차량까지 국민차대열에 가세, 연간 12만대의 국민차가 인도네시아 전역을 누비게 된다.
25년간 인도네시아 자동차시장을 점령(점유율 95%)했던 일본차들은 순식간에 풍랑 거센 인도양으로 밀려날 처지다.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가격파괴를 선언, 차값을 15%이상 내려보았지만 한번 꺾이기 시작한 판매실적은 회복의 기미가 없다. 95년 한해동안 1,597대의 판매실적을 기록한 미쓰비시의 베스트셀러 「랜서」는 판매량이 월 40대로 급감했고 마쓰다의 주력모델 「MR-323」도 월 10대이상이 팔리지 않는다. 도요타의 현지법인 「아스트라」의 주가는 6개월만에 2달러에서 1달러로 급락, 반토막이 난 상태다.
일본 자동차회사들은 우선 가격면에서 「티모르」의 상대가 될 수 없는 상황이다. 인도네시아 정부가 티모르에게만 수입관세(65%)와 사치세(25%)를 3년동안 면제하는 바람에 일본차의 60% 수준인 대당 3,500만루피아(1만5,000달러)에 팔리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전세를 만회할 뾰족한 대책이 없는 상황이다.
인구 1억9,000만명, 국토길이 5,000㎞, 1만7,000여개의 섬과 600여 민족으로 구성된 다민족 국가. 어느모로 보나 동남아 지역의 대국인 인도네시아는 그동안 자동차때문에 국민적 자존심이 구겨질대로 구겨진 상태였다. 지난 30여년간 꾸준한 공업화로 항공기 통신위성 선박 등에서는 기술축적을 이뤘지만 자동차만은 예외였다. 인도네시아를 자신들의 소비시장으로 전락시킨 일본기업들이 기술이전을 거부한 탓이다.
20여년간 장기집권을 하고 있는 수하르토 대통령이 자동차산업을 일으키기 위해 나선 것은 당연했다. 90년대초 「국민차 프로젝트 추진팀」이 비밀리에 발족됐다. 일제차의 판매시장으로 전락한 위치를 국민차로 만회하겠다는 복안이었다. 국민차의 합작파트너가 결정되지도 않은채 수하르토 대통령은 이름부터 지었다. 「티모르」. 인도네시아어로 「단결, 결합」이라는 뜻이다. 남은 것은 이제 어느 나라, 어느 업체와 손을 잡느냐였다. 인도네시아는 『스승(일본)은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지만 제자(한국)는 그렇지 않은 것 같다』며 일본업체를 제치고 지난해 2월 기아자동차의 손을 들어줬다. 97년 4월 현지생산이후 1년이내 국산화 20%, 2년내 40%, 3년내 60%를 달성시켜 주겠다는 파격적인 제의를 신뢰한 것이다.
기아가 승리를 따내긴 했지만 분쟁의 소지는 여전히 남아있다. 미국과 일본이 「티모르에 대한 세제혜택은 불공정 무역행위」라며 지난해 10월 국제무역기구(WTO)에 제소하는 등 훼방을 걸고 있다.
하지만 기아티모르모터스 한상훈 사장 등 기아측 핵심관계자들은 장래를 낙관하고 있다. 인도네시아 정부의 입장이 확고하기 때문이다. 산요토 투자부장관은 최근 기자회견에서 『기아를 파트너로 선정한 것은 기술후진국의 「마지막 권리」로 누구도 이를 비난할 수 없다』며 일본과 미국에 직격탄을 퍼부었다. 텅키 상공부장관도 힘을 보탰다. 그는 지난해 6월 바셰프스키 미국 무역대표부 대표서리를 만난 자리에서 『인도네시아 국민차 사업은 협상의 대상이 아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수하르토 대통령도 지난해 8월 일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국민차계획은 불변』이라며 못을 박았다.
인도네시아 정부의 의지는 곳곳에서 드러난다. 인도네시아측 파트너로 35%의 지분을 갖고 있는 훔파스그룹 후모토 회장이 수하르토 대통령의 세째 아들이다. 정경유착이라는 비난도 있지만 인도네시아가 「400년간 식민통치를 받은 나라」, 「중국인이 경제력을 장악하고 있는 나라」라는 특수성을 감안하면 어느정도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창업자인 고 김철호 사장이 「아시아에서 일어선다」며 44년 기아라는 이름을 붙인지 53년만에 동남아의 대국 인도네시아에서 「기아」의 꿈이 실현되고 있다.<자카르타=조철환 기자>자카르타=조철환>
◎3년후 차 해외생산 5배로/자동차 3사,2000년까지 135만대 계획
「해외로 해외로」
국내 자동차회사들이 해외 생산거점을 급속도로 확충하고 있다. 지역경제의 블록화 확산과 보호무역주의 강화에 따른 통상마찰을 방지하는 한편 현지의 저임노동력을 활용, 가격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것이다.
산업은행이 최근 내놓은 「1996년 한국의 산업」에 따르면 현대·기아·대우 등 자동차 3사는 2000년까지 해외 자동차생산능력을 135만1,000대(연간 생산량기준)로 늘릴 계획이다. 이는 3개 회사의 96년말 해외생산능력(연간 26만6,000대)의 5.1배에 달하는 규모이다.
업체별로 보면 기아자동차는 인도네시아 국민차사업권을 획득함에 따라 98년까지 현지에 승용차 7만대 상용차 5만대 등 12만대 규모의 생산공장을 건설하고, 2000년까지는 생산능력을 연산 15만대 규모로 확대할 계획이다. 기아자동차는 또 러시아와 터키에도 2000년까지 각각 5만대규모의 현지공장을 건설할 예정이다. 기아자동차의 계열사인 아시아자동차도 수입규제정책을 펴고 있는 브라질에 연간 생산능력 6만대규모의 소형상용차 공장을 건설할 계획이다.
채산성악화로 93년 캐나다공장의 가동을 중단한 현대자동차의 경우 인도에 10만대, 보츠와나에 4만대규모의 공장을 98년까지 건설할 계획이다. 또 말레이시아에는 프랑스 르노와 합작으로 연산 2만대 규모의 상용차공장 건설을 추진중이다. 따라서 현대자동차의 해외생산능력은 96년 현재 5만2,000대에서 2000년에는 20만7,000대로 늘어난다.
2000년대 초반까지 해외 100만대 생산체제 구축을 목표로 하는 대우자동차는 지난해 루마니아에 연산 10만대, 폴란드와 우즈베키스탄에 각각 20만대 등 동유럽지역에 대규모 생산거점을 확보한 상태다. 대우자동차는 베트남에도 승용차와 버스공장을 건설하는 한편 중국에는 엔진과 트랜스미션 등을 생산하는 자동차부품공장 건설을 추진하고 있다. 이에 따라 대우자동차의 2000년 예상해외생산설비는 78만2,000대에 육박하게 된다.<황유석 기자>황유석>
◎인터뷰/기아티모르 한상훈 사장/한국차 자존심 지키려 지난해 잠 덜자고 뛰어 이젠 수확기쁨만 남아
『한국차의 자존심을 위해 열심히 뛰고 있습니다』
인도네시아의 수도 자카르타에서 동쪽으로 80㎞ 떨어진 치캄펙지역. 불과 1년전만 해도 열대우림이 무성했던 밀림을 밀어내고 기초터파기 공사가 한창인 국민차 공장건설현장에서 한상훈(45) 기아티모르모터스 사장을 만났다.
『1년동안 제대로 잠을 자본 적이 없습니다』
온몸이 땀에 젖은 구릿빛 피부의 한사장은 96년 8월 현지사장으로 부임한뒤 꽤나 마음고생이 심했다고 털어놨다. 특히 한사장을 아직도 어리둥절케 하는 것은 우리와는 전혀 다른 종교와 풍습. 국민의 90%이상이 이슬람교를 믿는 인도네시아는 요즘 해가 뜨는 낮동안에는 금식을 해야 하는 「라마단기간」이다. 한사장은 『라마단기간과 장대비가 퍼붓는 우기가 겹쳐 공장완공까지 해야할 일은 많은데도 공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걱정』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한사장은 요즘 한시름을 놓은 상태다. 혼미했던 인도네시아의 국내정세와 국민차사업에 대한 일본과 미국 등 외국 자동차업체의 집요한 방해공작이 수그러들었기 때문이다.
한사장은 『일본과 미국 유럽연합(EU)이 세계무역기구(WTO)에 인도네시아 국민차사업에 대한 제소를 취하, 향후 사업진행에는 어떤 문제도 없다』고 단언했다. 그는 『인도네시아 정부가 미국 법률회사인 「화이트 앤 케이스」의 협조로 미국 일본 EU의 WTO제소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다』면서 『국민차 사업을 기간산업으로 육성하려는 인도네시아 정부의 의지가 워낙 확고해 미국과 일본업체들이 굴복했다』고 말했다.
한사장은 인도네시아 정세에 대해서도 『한때 인도네시아를 들썩거렸던 정쟁이 평온을 되찾았다』며 『이제는 하루빨리 공장을 완공, 「티모르」를 생산하는 일만이 남았다』고 자신했다.<조철환 기자>조철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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