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엔 ‘사상적 회오’를 극복케한 감동으로/이제는 내 소설의 모범답안으로 다가와77년 나는 열아홉살이었다. 줄곧 부모와 선생님이 가리켜 보이는 곳만 쳐다보고 자란 얌전한 소녀였던 나는 대학생이 되어 처음으로 혼자 서울에 올라왔다. 그런 내가 교내 신문사에 들어가면서 민중이라는 말을 알게 되고 그 강력한 「경향성」을 좇아 급격히 정의감에 불타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나는 「전환시대의 논리」를 들먹이는 데에서 대학생이 된 우월감을 느끼는 한편, 점심을 거르는 일을 암울한 시대에 동참하는 성의 표시로 여기는 바람에 기숙사 룸메이트의 비웃음을 사기도 했다. 그리고 이 역시 당연한 수순이겠지만 얼마 안 가 「사상적 회오」에 빠지고 말았던 것이다.
나는 「스터디」라는 것을 하면서 더 이상 이해하는 척하는 데 한계를 느꼈고, 그런 나의 「나이브」한 기질 때문에 자책과 부채감을 짊어지게 되었다.
그 무렵 읽은 것이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였다. 그것은 「창작과 비평」이라는 지면의 무게에도 불구하고 강요된 감동이 아닌, 나 자신의 자력에 의한 감동을 얻어냈다는 점에서 나에게 무척 뜻깊은 소설이었다.
「아홉 켤레의 구두」는 낯을 낼 만한 일을 전혀 하지 못하는 무능한 권씨가 얼굴 대신 자신의 자존심을 투사하는 대상이다. 「세간이라고는 깔고 덮는 데 쓰이는 것과 쌀을 익혀서 담는 몇 점 도구가 전부」이면서 장롱이 있어야 할 짜리에 구두 아홉켤레를 모셔 두는 것이다.
권씨가 세들어 사는 집 주인은 「다방에 앉아 재벌을 욕하고 불평등한 분배에 대해 흥분하면서도 속으로 껌팔이 아이를 따돌리는 방법을 강구하는」 소시민이다. 그는 보퉁이 몇개뿐인 권씨의 이사 장면을 보며 「가관이다 못해 장관이다」고 혀를 차지만 한편 권씨가 사직 당국의 내사 대상이라는 사실 때문에 불편한 심기에 빠진다. 그런 그의 갈등과 모순은, 자신의 문학과 일치된 삶을 산 찰스 램과 빈민가 아이를 지팡이로 쫓았던 찰스 디킨스의 대비를 통해 얼마나 실감나게 다가왔던가.
또한 인간에 대한 실감나는 묘사 못지않게 내 마음을 흔든 것은 그 불완전한 인간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각이었다. 뒤집어진 삼륜차에서 참외가 굴러 떨어지자 경찰과 맞서다 말고 우르르 몰려가 눈깜짝할 사이에 먹어치워버리는 시위대에게서 인간이라는 존재의 「나체화」를 본 권씨. 그가 비로소 도망치는 나약한 인간에서 벗어나 시위대에 앞장서는 장면은 감동적이지만 좌절이 예정돼 있기에 슬프다. 바로 그렇게 섣불리 민중의 승리 따위를 계도하지 않고 삶을 냉철하게 보려는 것이 리얼리티일 것이다.
이 글을 쓰기 위해 「아홉 켤레의…」를 다시 읽으면서 몇 번이나 뜨끔했다. 내가 소설 속에서 그려 보이려고 애쓰는 인물의 면밀한 묘사나 희화적인 설정의 모범답안이 나와있었던 것이다. 그뿐이 아니었다. 소설 속에 삶을 환상없이 있는 그대로의 누추한 모습으로 담아보려는 긴장 같은 것도 내가 혼자서 알아낸 방식이 아님을 깨치게 되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내 젊음이 통과했던 70년대라는 시대와 그리고 70년대 문학에 빚을 지고 있었으며, 내가 만들어내는 것은 의식하든 못하든 이 땅에서 살았던 사람들이 한 일의 연속선 위에 있음을 다시 한 번 깨닫는다.<은희경>은희경>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