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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갈/고향과 사랑과 혁명이 가져다 준 기쁨(자화상 기행: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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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갈/고향과 사랑과 혁명이 가져다 준 기쁨(자화상 기행:5)

입력
1997.02.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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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하하는 모습인가, 개선하는 모습인가? 여자가 어깨에 남자를 태우고 서 있다. 여자의 어깨에 올라탄 남자는 무엇이 기쁜지 포도주잔을 치켜들고 있다. 붉고 노란 밝은 빛깔이 전체에 감돌아 기쁨과 들뜬 분위기이다. 남자의 머리 위에 그려져 있는 것은 천사다. 여자의 옷과 장갑이 예복인 것 같아서 약혼이나 혼인식과 관련된 느낌이다. 얼굴을 보아서 샤갈(1887∼1985)과 그 아내임이 분명하나, 둘은 그림이 그려지기 두해 전에 결혼했으므로 뒤늦게 이런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좀 새삼스럽다. 흔히 이 그림과 함께 3부작으로 불리는 마을 위를 날아가는 두 남녀를 그린 「마을을 넘어서」(1914∼18), 샤갈이 공중에 떠있는 아내의 손을 잡고 걷는 「산책」(1917∼18년)이 있지만 이 그림처럼 축제 분위기가 넘쳐나지 않는다.이들은 무엇 때문에 들떴는가? 그는 고향에 돌아온 것이다. 유태계로서 러시아의 시골마을에서 태어난 그는 고향에서 미술 교육을 받다가 20대의 거의 대부분을 당시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거쳐 파리에서 보냈다. 다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와 결혼한 뒤인 1917년에 일어난 러시아혁명으로 가족을 이끌고 고향에 간 샤갈. 러시아의 유태계로서는 혁명은 바로 해방이었다.

또 가난과 외로움에 떨던 파리 시절, 같은 처지의 망명객으로 혁명 후 큰 직책을 맡게 된 문예이론가 루나찰스키의 지원으로 그는 미술위원 자격으로 미술학교를 이끌게 됐다. 고향에 안착해서 새로운 시대를 여는 일을 하게 된 것이다.

세로로 긴 화면의 바닥에 깔린 풍경은 고향 비테브스크의 전경이라고 한다. 인물들의 태도와 색채에서 풍겨나오는 도취와 만족감은 그러나 개인적인 행운에 관련된 것만은 아니다. 고향과 그 고향이 주는 문화적 일체감은 후에 파리 문화와의 일체감과 더불어 샤갈을 샤갈답게 만든 중요한 요소다. 특히 젊은 시절 파리에서 느꼈던 절박감은 되새겨 볼만하다. 『러시아 미술은 마치 유럽 미술의 흔적을 뒤따라가도록 운명지워진 것처럼 보인다… 여기 루브르 미술관에서 마네, 밀레와 그 이외의 많은 화가들의 그림 앞에 서서 나는 왜 나와 러시아 그리고 러시아 미술과의 연대관계가 작동하지 않았는 지를 이해하게 되었다… 나는 러시아를 사랑한다』(자서전 「나의 인생」중에서)

1911년, 공모전에 출품한 자화상이면서 가축으로 대표되는 고향의 풍경과의 일체감을 표현해 이름난 「나와 마을」을 그리기도 했던 샤걀이 세계미술의 중심지였던 파리에서 겪어야 했던 정체감의 상실은 이렇듯 컸다. 그러므로 이 그림은 『나는 이제부터 내 고향과 그 문화를 사랑하고 이를 떨치겠노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동시에 20세기에서 가장 행복한 모습의 자화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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