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숙한 문화물이 외면받는 틈새로 무협소설·만화 등 대량 생산된 문화가 파고든다지난해 김수영문학상을 받은 시인 유하씨는 자칭타칭 키치 중독자이다. 그는 자신의 시에서 「하여튼 난 너무 영화적으로 생각하는 게 병이라니까」라고 말한다. 비단 유씨 뿐일까? 「너무 영화적으로 생각하는」 사고가 그뿐만이 아니고 사실상 우리 모두에게, 문화 전반에 만연해 있으며 그것이 명료하게 의식되지 못한다는 것이 키치의 위세를 역설적으로 말해 주는 것 아닐까?
기존 문화 장르들을 무찌르고 문화의 전면으로 부상한 만화나 만화영화, 무협소설·무협시, SF·초능력소설, 검열을 빠져나갈 정도의 섹스를 곳곳에 바르고 있는 삼류 포르노물 등의 범람이 겉으로 드러나는 문학·출판의 키치의 모습이다. 이런 출판물들은 대형서점의 베스트셀러 집계에도 오르지 않지만 언제나 사실상의 최대 베스트셀러라는 것이 출판 관계자들의 말이다. 오늘의 문화소비 대중은 엄숙한 모습을 한, 고전적 의미의 문화물에서는 눈을 돌린다.
작고한 문학평론가 김현씨는 『복제기술의 발달은, 오래 구상하고 그것을 정제된 형태로 표현하는 예술보다는, 대량으로 생산되고 소비되는 예술을 더욱 가깝게 만든다』며 『세련되어 약간의 혹은 대단한 심미안을 가질 수 있는 사람만이 향유할 수 있는 예술은 점점 뒷면으로 물러나고, 별다른 심미안이 없이도 그것을 쉽게 소비할 수 있는 예술이 앞면으로 나선다』고 키치화의 핵심을 짚어낸 바 있다.
유하씨는 김수영문학상을 받은 뒤 자신의 시 쓰기를 『대중문화 비판을 위해, 일정한 시나리오에 따라 했던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지만, 그의 초창기 시는 거의 모두가 키치를 소비하고 그것에 중독돼 있는 자신―바로 우리의 모습을 패러디하고 반성하는 것이었다.
국내 문학·출판계에 키치의 바람을 몰고 온 것은 뭐니 해도 80년대말 소개된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나 「댄스 댄스 댄스」 등 작품 속에서의 올드 팝이나 재즈 넘버들의 절묘한 사용과 배치, 비틀스의 노래 「노르웨이의 숲」(국내에서는 「상실의 시대」로 번역)을 책 제목으로 쓴 하루키는 이후 국내 문단에서 소위 「혼성모방」과 「표절」시비까지 불러 일으키기도 했다. 최근 출간된 「밤의 원숭이」는 그가 쓴 광고 카피만을 묶은 것으로 「자본주의 상품미학의 이용」이라는 키치의 본모습을 가장 잘 드러낸 것.
문학평론가 남진우씨는 『최근 일부 신세대 작가들의 작품을 키치적이라고 볼 수도 있다』면서도 『그러나 적어도 그들은 후기 산업사회적 겉멋 부리기식 키치에서는 벗어나 있다』고 말했다.<하종오 기자>하종오>
◎키치의 발전소 방송국/클래식은 ‘열린음악회’로 고급미술은 ‘문화가 산책’으로/어렵고 복잡한 본질을 뺀 분위기만이 유통되는 곳… 그이름은 텔레비전
대중문화는 언제나 「잡식성」이다. 대중들이 미처 향유하기 어려워하는 고급 문화를 만만하게 포장해 내는 기술, 이것이야말로 대중문화의 존재 기반인지도 모른다.
「대중문화의 꽃」 방송에는 그래서 이 시대의 철학과 고급 문화가 대중적이고 서민적인 취향으로 녹아들어 있다.
클래식과 순수미술은 방송의 키치 대상 1호이다. 복제가 불가능하거나 복제로 인해 상품의 질이 떨어지는 것이 클래식 예술의 특성이다. 아무리 복제해도 복제될 수 없는 예술의 독특한 기운을 헤겔은 「아우라」라고 불렀다. 하지만 텔레비전은 「아우라」 대신 분위기로 시청자를 유혹한다.
다이제스트한 클래식 공연을 보여주고 「열린 음악회」 「청소년 음악회」 같은 프로에서도 팝스오케스트라에 맞춰 「라 트라비아타」의 한 부분을 노래한다. 한 편에선 열심히 립싱크를 틀어대는 방송이 다른 한 편에선 「이소라의 프로포즈」같은 라이브 음악 방송으로 시청자들의 고급 취향을 자극한다. 하지만 진지한 라이브는 시청률을 떨어뜨릴 우려가 있으므로 수다 반, 음악 반으로 「절충」을 모색한다.
이해하기 힘든 현대미술은 「문화가 산책」 같은 프로그램에서는 연예뉴스나 마찬가지다. 미술평론가는 어려운 현대미술을 깎고 자르고, 반쯤 소화시킨 후 시청자들 입에 말랑말랑한 형태로 넣어준다.
장르의 혼합. 텔레비전 권위의 상징인 9시 뉴스를 보자. 뉴스는 우선 관념적으로 가장 무거운 뉴스로부터 시작한다. 그것은 대개 정치 경제 사회 뉴스 순이다. 현장 멘트가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비장한 시작. 이후 뉴스는 가정, 교육, 소비자, 여성 문제를 거론하고 날씨를 이야기한다. 마지막엔 앵커가 하루의 뉴스를 쉬운 말로 정리한다. 이러한 서술구조(내러티브)는 마치 한 편의 단막 드라마와 비슷하다. 사건 그 자체의 중요도에 의해서가 아니라 시청자들의 기호에 맞추어 뉴스가 가공되고 배열되는 전도현상이 일어난다. 뿐만 아니라 뉴스 그 자체가 드라마처럼 극적 구성을 띠는 것도 키치적이다. 현대 대중문화의 척추인 방송은 결국 키치의 대량 생산, 유포에 이어 또다시 재생산 고리를 만들어가는 거대한 키치의 발전소인 셈이다.<박은주 기자>박은주>
◎‘키치작가’ 최정화씨/“키치는 조악한 미술이 아닙니다”
최정화씨는 「가슴시각개발연구소」 소장이다. 낙원상가 아파트에 있는 「가슴…」의 내부는 꼭 마무리가 덜 끝난 아파트 공사현장 같다. 사면 벽과 천정은 콘크리트 맨살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한쪽 벽면으로 「나쁜 영화배우 급구」라는 제목의 큼지막한 포스터가 붙어 있다. 「키치 작가」라는 명성에 걸맞게 우리 주변에 널린 조악하고 거친 재료들로 작업해온 그답게 「카페 여급모집」 광고를 살짝 비틀어 기묘한 효과를 낸 포스터 작품이다.
인테리어 디자이너이자 설치작가인 최정화(36)씨. 그와 그의 작품은 국내에서보다 오히려 외국에서 더 큰 인정을 받고 있다. 도쿄(동경) 「아시아 산보」전(3월14일∼4월5일)을 위시하여 파리 개인전(9월6일∼10월25일), 토론토 「FAST FORWARD」전(9월26일∼12월25일) 등 이미 전시 일정이 빡빡하다.
『키치는 비단 미술만의 이야기도, 또 그렇게 비난받아 마땅한 악취미나 조악한 미술도 아닙니다. 키치는 이미 우리 일상 깊숙이 들어와 있고,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의 지난 근대화 과정 전체가 키치적이었다고 봅니다. 외국 관람객들이 흔히 제 작품을 보고 한국적이다, 모던하다고 말해요. 그만큼 한국적인 것이 키치적이라는 건지? 단죄나 비난 이전에 한번쯤은 어깨에 힘빼고 찬찬히 우리 문화 전반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키치의 색다른 해석으로 주목받고 있는 또 하나의 팀 「신식공작실」. 주로 우리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를 사용하여 만든 「철수와 영이」 캐릭터 시리즈 등이 적지 않은 호응을 얻고 있다. 현재 실장인 현태준씨의 문제제기에 동의한 7명의 젊은 작가들이 91년 모여 결성한 공동작업팀이다. 모토는 「아는 것만 하자」. 친숙한 작품들이 어린 시절의 향수를 따스하게 자극한다.
『없어도 괜찮지만 있으면 좋은 것』이라고 자신들의 작업 성격을 설명하는 「신식공작실」팀과 「먹물 키치」라고 스스로를 표현하는 최정화씨. 키치는 이들의 손끝에서 조야하고 천박한 미완성품이라는 누명을 벗고 새로이 거듭 태어난다.<황동일 기자>황동일>
◎전문가 진단/최범 미술평론가/대한민국은 ‘키치공화국’
키치라는 것은 더러 주변에서 보게 되는 야릇하게 튀는 취미나 스타일의 일종은 아니다. 하나의 스타일이기에는 그것은 너무나 다양한 얼굴을 가지고 있고, 특정 집단의 취미이기에는 매우 널리 확산되어 있기 때문이다. 분명 키치라는 말은 아직 대중에게 낯설다.
그러나 그 대상과 현상들은 공기만큼이나 친숙하며, 그렇기 때문에 잘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독일어 「키치」는 원래 「저속한 싸구려 모방품」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벼룩시장에나 가야 마주칠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왜냐하면 현대 산업사회 또는 대중소비사회는 그러한 물건들의 포화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키치란 산업사회 특유의 소비행태이자 문화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키치가 산업사회를 자신의 번식처로 삼고 있는 배경은 무엇인가. 원칙적으로 계급이동과 신분상승이 가능한 현대사회의 구성원들은 자신이 기대하는 상태를 문화적으로 선취, 확인하고자 하는 욕망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키치 발생의 첫 번째 조건은 바로 이처럼 현재 삶을 상승시킬 수 있는 길이 공식적으로 열려 있다는 것(자유민주주의)이다.
두 번째 조건은 현재의 위치 자체에 변화가 없이도 그러한 욕망을 충족시켜줄 것 같은 대체물들이 산업적으로 대량생산되어 값싸게 공급될 수 있다는 것(대량생산의 신화)이다. 그러므로 「키치란 신분상승의 환상에 대응하는 문화적 실천」이라고 정의될 수 있다.
그런데 이때 상승의 느낌을 제공하는 문화적 자원들이 반드시 한 사회 내에서만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과거로부터 오기도 하고, 다른 사회로부터 주어지기도 한다. 전통문화와 서구문화에 대해 각각 이중적인 콤플렉스를 안고 있는 현대 한국사회는 키치가 부화하기에 더할 나위없는 온상인 셈이다. 『키치의 발전을 통해 제3세계의 산업화 정도를 알 수 있다』라는 어느 학자의 지적을 우리 사회는 모범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키치는 결국 진정한 문화체험이 되지 못한다는 데 문제가 있다. 그것은 언제나 함량미달의 대리만족만을 제공할 뿐이다. 우리 사회가 키치 공화국을 벗어나는 길은 다른 데 있지 않다. 우리의 문화적 의미를 끊임없이 과거나 물 건너로부터 차용해 올 것이 아니라, 지금 이곳 자신의 삶 속에서 부단히 찾아내고 채워나가는 것일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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