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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두 얼굴/이병일 논설위원(메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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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두 얼굴/이병일 논설위원(메아리)

입력
1997.01.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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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년께 도쿄(동경)에서 근무할 때의 일이다. 어느 일요일 도쿄 긴좌(은좌) 미쓰코시백화점 길 건너편에 있는 파출소에 길을 물으러 들어갔다. 젊은 순경은 길을 가리켜 줄 생각은 않고 대뜸 외국인등록증을 보자고 했다. 일본어 발음과 억양에서 외국인임을 금방 안 것이다.제시한 등록증을 한참 들여다보더니 사진에 철인이 찍혀 있지 않다며 본서까지 동행할 것을 요구했다. 등록증을 받아 살펴보니 정말 철인이 없었다. 순경의 날카로운 눈매에 감탄하면서도, 이것은 내 잘못이 아니라 등록증을 만든 일본공무원의 실수라고 설명해도 막무가내였다.

할 수 없이 일본 외무장관이 발행한 특파원 신분증을 내보였다. 그런데도 그는 고집을 꺾지 않고 불법입국자나 잡은 듯 기세가 등등했다. 화가 나서 「내가 잘못한 것이 없고 특파원 신분증까지 믿지 않는다면 내 발로는 본서까지 갈 수 없으니 연행할 테면 강제로 끌고가라」고 버텼다.

어쩔 수 없었던지 순경은 본서간부에게 전화를 걸었다. 간부는 「왜 특파원을 붙잡아 골치 아픈 일을 만드느냐」고 나무라는 눈치였다. 전화를 끊은 뒤 순경의 태도가 180도 달라졌다. 「돌아가도 된다」며 갑자기 일본인 특유의 친절(?)을 베풀었다. 마치 1시간동안의 언쟁을 잊은 듯해 어안이 벙벙했다.

새삼스럽게 옛일을 들먹인 것은 벳푸(별부)에서 열린 한·일정상회담에서 웃음을 뿌린 하시모토(교본룡태랑) 일본총리와 그 전날 위안부문제에 대해 「그 당시는 공창제도가 있었다」는 등의 묘한 발언을 한 정부대변인 가지야마(미산정륙) 관방장관의 얼굴이 「친절」과 「오만」이란 두 얼굴을 가진 그 순경과 너무나 닮았기 때문이다.

한국측이 불쾌하게 여길 줄 뻔히 알면서도 의도적인 발언을 한 관방장관과 다음날 한국대통령을 만나 가지야마장관의 망언을 사과하고 우호를 다짐한 하시모토 총리는 전형적인 일본의 두 얼굴이다. 두 사람은 오만과 친절을 상황에 따라 적절히 나누어 사용한 순경의 두 얼굴을 하나씩 가졌다고 할 것이다.

우경화 바람이 거세짐에 따라 이같은 일본의 두 얼굴을 더욱 자주 보게 될 것 같다. 망언 등으로 문제화시킨 후 필요하면 사과나 발뺌하는 수법으로 목적하는 바를 조금씩 이뤄 온 것이 바로 일본이다. 외국원수의 야스쿠니신사 참배문제와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기습적인 보상 및 복지비 지급이 좋은 예다.

신사참배문제는 외국의 반발로 주춤해졌지만 자민당은 이를 제기, 문제화했다는 점만으로도 성공한 셈이다. 한국측이 크게 반발한 한국위안부 피해자 7명에 대한 민간기금에 의한 보상금 지급 등도 마찬가지다. 기정사실화했다는 점에서 뜻한 바를 이룬 것이다.

「망언과 사과」란 치고 빠지는 작전이 반복되다 보니 오히려 우리가 여기에 길들여지고 있다. 한보파동처럼 한국내 상황이 어지러워지면 일본의 두 얼굴은 그 틈을 노린다.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복지비 지급이 이를 말해 준다. 이에 맞서야 하는 우리는 감정만 내세웠지 적절한 정책이나 이론이 없다.

유대인들은 지금도 나치전범을 추적하고 있다. 미국은 얼마전 일본인 전범 16명의 미국입국을 금지시켜 우리를 놀라게 했다. 이에 비해 그동안 우리는 부끄러울 정도로 한 일이 너무 없다.

진정한 극일과 일본청산을 위해서는 치밀한 조사와 연구가 선행되어야 한다. 이를 바탕으로 망언과 사과, 오만과 겉친절 등 두 얼굴을 교묘하게 구사하는 일본에 대항할 수 있도록 우리의 주장과 논리를 확립해야 한다. 일본총리가 한국대통령을 「아니키」(형님)라고 불러주는 친절에 들뜰 것도 없고 망언한다고 흥분할 일은 더욱 아니다.

일본의 두 얼굴에 비친 일본의 기본적인 대한국 인식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진 것이 없음을 마음에 새겨야 한다. 10여년전의 그 순경도 망언과 사과를 되풀이하는 일본정부처럼 겉친절 속에 오만함을 감추고 지금도 외국인, 특히 한국인 등 동양인에 대해 감시의 눈초리를 번득이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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