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너머 열린 미래로’ 우리가 간다/두라·21세기 프론티어 등 200300개 그룹 활동/수평적 연대바탕 21세기 비전 모색 ‘새바람’ 30대가 주축이 된 청년그룹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있다. 이들 청년그룹은 기성 사회단체와 완전히 단절된 조직으로 생겨나 활동하고 있다는 점에서 사회사적 관점에서도 새로운 현상으로 분석된다. 이 때문에 청년그룹 결성붐은 「30대의 반란」혹은 「기성세대에 대한 독립선언」이라고 일컬어진다.
이들이 지향하는 목표는 매우 다양하다. 30대의 정치세력화, 자유토론, 대중운동, 경제동아리, 영상을 통한 청년교육에서부터 국회의원비서관 모임, 심지어는 30대를 위한 문화공간 창출을 목표로 카페를 연 그룹도 있다. 오늘의 30대가 20대였을 때 그들을 하나로 묶었던 「반제·반독재」와 같은 연대는 없다. 굳이 공통점을 찾는다면 30대 청년그룹이 과거 운동권 핵심세력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는 것과 21세기를 향한 비전을 모색하고 있다는 정도이다.
30대 청년그룹의 결성 붐은 90년대 들어 들불처럼 번져가고 있다. 건강한 공론형성을 목표로 90년 출범한 두라와 21세기프론티어, 정보·통신 등 기술직 사무자 모임인 한국과학기술청년회, 정보·통신 금융 대기업사원이 회원인 경제동아리 코리아싱크풀(KTP), 정치운동을 지향하는 21세기전략아카데미 푸른사람들, 대중운동을 표방하는 청년정보문화센터, 영상을 통한 청년교육과 토론문화 추구가 목표인 포럼2001, 국회의원비서관 등 청년정당인 주축의 미래정치문화연구회, 카페 「동숭동에서」를 운영하며 30대의 공간 마련에 힘쓰는 열린공간30 등등. 지역단위의 30대 모임까지 합할 경우 200∼300개의 청년그룹이 활동중인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무엇이 이러한 청년그룹의 러시를 가능케 했을까. 청년정보문화센터 교육위원장 우상호(35)씨는 『광주항쟁, 6·10민주화항쟁 등 공통의 역사적 체험이 30대에게 무의식적인 집단성과 비판적 사회인식, 강한 연대감을 길러주었고 이것이 청년그룹결성의 내적 원동력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80년대 역사적 체험에 바탕한 시대적 산물」이라는 것이 그들 스스로의 평가이다.
청년그룹들은 대개 PC통신망 등을 통한 네트워크조직을 갖고 미래지향적인 목표를 추구하는 점이 특징이다. 정치를 논하지만 정치 지향적이지는 않다. 엄격한 규율과 이념적 단결을 기반으로 한 학생운동조직과 달리 다양성과 수평적 연대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PC 통신망상의 CUG(폐쇄동호회)나 인터넷 홈페이지 등 통신매체를 통해 접촉하는 빈도가 높고 자유토론을 중시하는 포럼형식이 30대 청년그룹의 특징이다.
청년그룹들은 21세기의 비전, 새로운 문명, 실험정신 등 미래지향적 성격을 갖고 있다. 이는 청년그룹들이 대거 결성된 93∼94년 우리사회 안팎의 거대한 변화와 맞물린다. 문민정부의 등장과 구소련 및 동구권의 몰락은 80년대 학생운동을 이끌어온 「반제·반독재」가 더 이상 인식의 패러다임으로 자리잡을 수 없다는 것을 일깨웠다.
21세기전략아카데미, 젊은연대 등 청년세대의 정치세력화를 기치로 내건 청년그룹들도 있다. 그러나 이들은 지난해 지자체선거와 총선을 거치면서 내부 갈등과 함께 침체현상을 보이고 있다. 젊은연대는 총선이후 사실상 해체됐다. 30대의 정치세력화는 아직은 시기상조인지도 모른다. 21세기전략아카데미의 이호윤(35) 사무국장은 그러나 『청년세대가 기존의 정치판을 방치할 수 없기 때문에 정치세력화의 노력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30대의 백화점식 그룹결성 추세에 대해 곱지않은 시각도 더러 있다. 계모임 수준의 친목단체라거나 인맥만들기, 몸값불리기, 정치진출의 발판 마련하기 등 「비난」도 다양하다.
기성 사회운동단체인 참여민주사회시민연대의 김모(33)씨는 『상당수 청년그룹이 실천적 역량을 갖추지 못한 채 동호회적 성격을 갖고 있어 의미있는 사회활동에 한계를 보이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비판적 인식에도 불구하고 일부 청년그룹은 나름대로의 사회적 성과를 거두고 있다. 기술전문가들로 구성된 한국과학기술청년회는 통신시장개방과 관련한 백서발간, 특허심판 전문법원 설치의 필요성을 제기해 성과를 거두었다. 또 청년정보문화센터는 전자주민카드 반대운동을 벌여 목소리를 인정받고 있다. KTP는 법인으로 등록해 경영컨설팅이나 기업조사활동도 하고 있다.
강원대 나정원(39·정치외교) 교수는 『청년그룹이 생겨나는 현상은 대단히 긍정적』이라며 『이들은 앞으로 우리 사회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담당하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나교수는 『이들 청년집단은 과거와 달리 사회전반적 변화보다는 자기 분야에서 변화를 유도하는 변혁세력』이라고 평가하고 『소속원들이 각자 전문분야를 갖고 있어 정치세력화보다는 이익집단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30대 청년그룹이 민주화를 이끌어낸 80년대 학생운동과 같이 세기적 전환기에 일정한 역할을 담당할지는 미지수다. 분명한 것은 그들이 21세기를 자신들의 활동공간으로 분명히 의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정진황 기자>정진황>
◎사회운동단체사/민주화 앞장 종교·정치적 단체 주류/87년이후 교통·여성·환경 등 전문화
청년그룹 결성붐과는 별개로 30대는 기존 사회운동단체에도 대거 참여, 시민운동의 새 지평을 개척해 나가고 있다. 80년대 왕성한 학생운동을 주도했던 그들은 특유의 조직력과 창의성으로 부침을 거듭해온 기성의 시민운동단체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60, 70년대의 사회운동단체들은 대부분 그 바탕에 종교적 배경을 깔고 있었다. 정치적 탄압이 심했던 만큼 종교적 색채가 상대적으로 활동의 자유로움을 보장해 주었기 때문이다. 당시를 대표하던 사회운동 단체는 YMCA YWCA 흥사단 정도. 그러나 그들의 활동은 제한적일 수 밖에 없었고 본격적인 정치문제를 제기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80년대에 들어서야 비로소 정치 성향을 띤 사회단체들이 시민운동의 전면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80년 「서울의 봄」과 「광주민주화항쟁」을 거치며 이념적으로 무장하고 조직화한 사회운동단체들이 84년 「정치인 해금」을 계기로 조성된 유화국면과 함께 속속 등장했다. 서노련 인노련 민청련 등 당시 결성된 단체들은 대부분 민주화운동을 목표로 삼은 것이 특징이다.
개별적으로 이루어진 이들의 활동은 85년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이라는 전국적 연대조직의 탄생으로 이어졌고 87년 6월항쟁을 이끈 국민운동본부를 통해 꽃을 피웠다.
6월항쟁을 거치면서 그동안 캠퍼스 안에서 숙성돼왔던 학생운동이 대거 교문을 나섰고, 사회운동단체들은 새로운 면모를 띠게 됐다. 우선 폭발적인 수의 증가. 경실련 부설 「시민의 신문」이 지난해 11월 발간한 「한국민간단체 총람」에 수록된 3,200여개의 단체중 56%인 1,800여개의 단체가 87년 6월항쟁 이후에 설립됐다.
또 다른 특징은 87년이전 사회운동단체들이 대부분 정치성향을 띤 데 비해 그 이후에 등장한 단체들은 교통·환경·여성문제 등 다양한 시민사회의 욕구를 대변하고 있다는 점이다. 참여연대 김기식 정책실장은 『87년 이전에는 정치권력 문제가 너무나 압도적이었기 때문에 초점을 다른데로 이동시킬 엄두를 내지 못했다』며 『6월 항쟁이후 정치적 억압이 조금씩 걷히기 시작하면서 사회운동단체도 다양한 욕구에 눈길을 돌리기 시작했다』고 분석했다.
30대가 대거 포진한 사회운동단체들은 이제 명실상부한 시민운동의 주력군으로서 자리를 지키고 있다. 「교통문제를 연구하는 시민의 모임」이 지난해 제기한 버스요금 부당인상 의혹, 「외국인 피난처」와 「우리민족 서로돕기운동」 등이 제기한 재중동포 사기피해사건 등은 시민운동이 일궈낸 개가이다.
전국연합 교육선전국장 김성회씨는 『시민사회와 국가를 연결하는 매개체로서 사회운동단체들의 역할은 앞으로 더욱 확대될 것』이라고 전망했다.<이동훈 기자>이동훈>
◎인터뷰/청년정보문화센터 임종석 소장/“다양한 정치·사회적 스펙트럼의 창구역할”/94년 11월 대중주의 표방출범/관심분야별 소모임 활동벌여
『각계각층의 청년들이 모인 만큼 다양한 정치·사회적 스펙트럼이 존재합니다. 이들의 다양성을 바탕으로 공론을 모아 사회문화적으로 건강한 흐름을 만들어 나가야죠』
하는 일이나 관심분야가 서로 다른, 그러나 동세대인임을 느끼는 「30대 청년」들이 모여 정보와 문화를 교환해 내부적 공감대를 만들고 이를 바탕으로 사회문제를 공론화하자는 모임. 청년정보문화센터의 소장 임종석(31)씨는 다양성이 없는 공감대는 역동성이 없음을 강조했다. 전대협 3기 의장을 맡아 89년 임수경(29)씨를 평양축전에 보냈고 이 때문에 3년6개월간 옥살이를 했던 그는 연세대 총학생회장 출신의 우상호(35)씨 등과 함께 94년 11월 대중주의를 표방하며 이 모임을 만들었다.
발족 당시 그는 선·후배들로부터 『도대체 정보문화센터로 뭘 하자는 거냐』는 말을 숱하게 들었다. 하지만 2년3개월이 지난 지금 평가는 많이 달라졌다. 회원도 처음 160여명에서 600여명으로 늘어났다. 청년정보문화센터는 열린 형태로 운영된다. 영화 노래 정보통신 교육 등 관심 분야별로 소모임이나 위원회가 만들어져 있어 회원은 자신의 관심분야를 찾아 활동한다. 그는 센터 내의 각종 모임이 대표 한 사람에 의해 좌지우지되지 않고 자치적으로 운영된다고 설명했다. 임씨는 『우리사회의 모든 분야는 우두머리가 사라지면 조직이 흔들리는 오너(Owner)중심조직으로 돼 있는데 청년정보문화센터는 자치체계이기 때문에 이같은 영속성을 유지할 수 있다』고 말했다.
최근들어 청년정보문화센터는 대외활동이 부쩍 늘었다. 지난해 11월 참여민주사회시민연대 민변 등 기성단체와 연합, 프라이버시의 침해우려가 있는 전자주민카드 도입반대 시민토론회를 열기도 했고 통신제한의 우려가 있는 전기통신법에 대해서도 개정운동을 펴고 있다.<정진황 기자>정진황>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