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외설 논쟁부른 파문의 ‘누드’/49년 전시 안호상 문교 직접 철거/게재했던 신문 정간사태 전쟁중 여체부분 오려가 분실『여성의 누드는 평화를 상징합니다. 가장 안전하고 편안한 시간과 장소가 아니면 그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 균형잡힌 여체가 빚어내는 매혹적인 선과 비례를 화폭에 옮기다보면 최고의 행복과 감동을 느낄 수 있습니다』
원로서양화가 김흥수(78) 화백은 여체의 숭배자인 동시에 창조자이다. 미의 기준과 이상을 여체에서 찾을 뿐 아니라 캔버스 위에 현란한 색채의 물결로 새로운 여인을 탄생시키기 때문이다.
김화백은 일본 도쿄(동경)미술학교에 입학한 1940년부터 누드를 그렸다. 지금까지 그의 손을 거쳐간 누드화만 줄잡아 500여점. 김화백은 이중에서 49년에 제작한 「나부군상」을 대표작으로 꼽는다. 목욕탕 안에서 다양한 포즈로 몸을 씻는 6명의 여인을 대담하게 묘사한 이 그림은 당시 장안에 엄청난 화제를 몰고왔다.
특히 이 작품이 그 해 열린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에서 입선하자 당시 안호상 문교부장관은 형사와 함께 전시장에 나타나 작품을 떼어내고 그 자리에 「당국의 지시에 의해 철회함」이라는 딱지를 붙였다.
이 사건은 국도신문 11월23일자에 보도되면서 큰 파문을 불렀다. 「양립되느냐? 예술과 윤리」라는 제목으로 작품사진과 함께 실린 기사는 교육자와 학생, 전문가 등의 의견을 들어 당국의 조치를 공박했다. 결국 국도신문은 이 기사가 화근이 되어 「대중에게 보여서는 안 될 작품을 공개했다」는 사과문을 내고 1주일간 정간당했다. 예술에 대한 몰이해를 드러낸 해프닝이었다.
그 뒤에도 화단을 떠들썩하게 했던 「나부군상」은 한국전쟁 때 훼손되고 말았다. 선린상고에서 교편을 잡던 김화백이 학교관사에 그림을 보관해놓았는데 유엔군들이 여체만 오려가버린 것이다. 도록도 제대로 못만들던 때라 사진도 없어 김화백은 국도신문에 난 그림사진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김화백은 55년 파리로 유학가서 누드화에 본격적으로 매달렸다. 61년 파리생활을 청산하면서 개인전을 열었는데 누드화 50점 중 40점이 그자리에서 팔렸다.
67년부터 82년까지 미국생활을 끝내고 영구 귀국한 그는 85년 대한적십자사창설 80주년 기념벽화를 누드화로 제작, 또 한번 화제가 됐다. 올해는 김화백이 77년 미국에서 「조형주의(하모니즘)회화」를 선언한지 20년이 되는 해. 조형주의는 여인의 누드와 기하학적 도형의 추상화를 대비시켜 그리는 독특한 화풍이다.
그는 조형주의 선언 20년을 기념하고 57년간 탐색해온 누드화를 결산하기 위해 1,000호(가로 750, 세로 250㎝)짜리 대작 「미의 심판」을 그리고 있다. 이 작품은 지금까지 100여명 넘는 모델을 대상으로 제작한 스케치 중에서 20여개를 골라 새롭게 구성한 것으로 작업이 20%정도 남았다. 6월말께 공개될 김화백의 제2의 대표작 「미의 심판」에서 누드화가 자아낼 수 있는 미의 극치를 볼 수 있을 것이다.<최진환 기자>최진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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