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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론의 자유(김성우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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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론의 자유(김성우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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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01.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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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초 한 중소기업 사장이 도하의 여러 일간지들에 낸 전 5단짜리 광고가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제품을 전량 해외로 수출한다는 이 사장은 「파업이 옳은 일인가?」라는 제하의 의견광고를 통해 우리나라 노동의 고비용 저효율 때문에 공장을 해외로 옮기고 국내 공장의 규모를 줄였다면서 작금의 파업사태를 기업인의 입장에서 통렬히 비판했다. 그러고는 자기 의견에 이의나 항의가 있으면 반드시 신원을 밝혀 연락하라고 자신의 이름과 주소, 전화번호 등을 명기했다.광고의 주장이 옳고 그르고를 떠나서, 적어도 기업인의 입장에서는 하고 싶은 말일 것이고, 그 말이 정부의 어떤 설명이나 경제인 단체들의 어떤 성명보다도 기업인의 처지를 이해시키는데 상당한 호소력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 호소력의 출처는 무엇보다도 익명이나 가명의 의견이 아니라 한 개인이 당당히 본 얼굴을 드러내 놓고 어떤 반론과도 논쟁하겠다는 용기에 있다.

어째서 그것이 용기인가. 본명의 주장이면 다 용기인가.

이 광고가 나오자 반응이 뜨거웠다고 한다. 지지도 있었고 비판도 있었다. 그 중에는 비난보다는 오히려 격려가 훨씬 많았다는 것이다. 박수를 많이 받을 의견이라면 거기에 무슨 용기가 필요했다는 말인가.

이번 의견광고는 우리나라 언론의 실상을 생각해 보게한다.

언론이란 제도화된 언론기관의 전유물이 아니다. 말이나 글로써 표현되는 개개인의 모든 의견이 다 언론이다. 언론자유는 신문이나 방송의 자유일뿐 아니라 모든 입의 자유다. 이 언론자유가 지금 우리나라에서 완전하고 안전한가.

언론자유는 반드시 권력이나 자본에 의해서만 침해되는 것이 아니다. 언론자유를 위협하는 것으로는 소위 국민감정이란 것도 있고 집단이기주의라는 것도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국민감정이 한번 분류하기 시작하면 언론은 감히 이에 역류하지 못한다. 국민감정은 다수의견이라는 대세를 몰고 이에 거역하는 언론을 홍수처럼 삼켜버린다. 국민감정은 이성적인 것이 아닐 경우가 있고 어떤 국민감정에도 반드시 소수일망정 이견이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반국민감정은 반국가적이라는 국민감정의 위협앞에 소수는 침묵해 버린다. 침묵은 곧 언론의 부자유다. 우리의 소수들은 너무 침묵에 익숙해 있다. 언론의 포기다.

집단이기주의가 언론에 가하는 압력도 마찬가지다. 한 집단이 물리적 위력을 가지고 그 집단의 이익과 상반되는 언론을 위압한다. 이럴 때 그 집단의 목소리앞에 다른 목소리들은 모기소리가 된다. 정론은 위축된다.

여러 사람의 공통된 여론을 공론이라고 한다. 이에 비해 일반이 동의하지 않는 개인적인 주장은 사론이다. 그러나 공론도 감정에 치우치면 공론일 때가 있고 사론이 언제나 도리에 어긋나는 사론이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종류의 언론도 아무 저해를 받지 않고 유통되는 자유시장이 진정한 자유언론의 사회다. 다중의 정서에 안맞는 의견이라 해서 사론이라 해서 원천적으로 봉쇄되고 공론이 아닌 것은 공적으로 간주되는 사회분위기에서는 언론이 살아있다 할 수 없다.

한 중소기업 사장의 파업사태에 대한 의견광고가 용기라고 하는 것은 우리 언론의 이 벽에 도전했기 때문이다. 「말하기는 어려우나 도저히 침묵할 수 없는 일」에 침묵을 깼기 때문이다. 그것이 진정한 여론이든 아니면 국민감정이나 집단이기주의의 소산이든 어떤 의견과도 의견으로 맞설 각오를 표명한 것이다. 사론의 자유를 천명한 것이다.

이 의견광고에 격려가 많았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있다. 지지의 반응이 반대보다 많았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여론의 통계일 수는 없고 그 광고의 의견이 반드시 일방적으로 옳았다고 단정짓지는 못한다. 그러나 적어도 수많은 사람들이 어떤 이유에서건 그동안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참아왔다는 말이요, 그래서 그 대리언론에 쾌감을 느낀다는 말이다. 그리고 물위에 뜬 조그만 얼음덩이는 물밑이 더 클 수도 있다는 것, 때에 따라서는 침묵하는 소수가 다수의견일 가능성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 침묵을 언론자유가 깨 모든 여론을 현실화시켜야 한다. 언론자유는 공론의 자유일뿐 아니라 사론의 자유이기도 하다.<본사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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