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일본의 식민지배 시대. 우리말, 우리글마저 못쓰게 하고 온 사회가 병영 같았던 30년대 후반기 중등학교에 입학. 조선인 학생을 멸시하는 일본인 교사를 한마디로 능멸. 최우수 졸업. 어린 시절 고향 강가에서 키웠던 조각가의 길을 가기 위해 도일. 미대 입학을 위한 예비교육을 받던 중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강제 징용. 비행기 조립일을 하다가 1년 후 탈출. 천신만고 끝에 함흥 부모집 도착. 체포를 피해 다시 기약 없는 토굴생활 1년. 드디어 해방. 다시 일본으로 가서 본격적인 수업을 거친 뒤, 일본 유수의 공모전에서 최고상 획득. 귀국 후 의욕에 찬 제작 활동을 벌였으나 서구중심의 형식화한 미술 풍토 속에서 돌아온 것은 시대 착오적인 작풍이라는 비난과 외면. 가난과 질병에 무릎 꿇어 스스로 만든 작업대에 목매 죽음.이것이 바로 「비운의 조각가」로 불리는 권진규(1922∼1973)의 이력이다. 사는 내내 집착했던 「나는 누구인가」 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이었던가? 목 긴 인물상을 수없이 빚어냈던 조각가 권진규. 그의 작품을 지나간 시절 미술교과서에서 한 두 번 쯤은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목이 긴 인물상」을 빚어 낸 미술가의 참담한 삶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 작품은 머리 부분만 따져 보면 실제의 반 정도의 머리 크기를 한 흉상이다. 만든 이 자신을 승려로 나타냈다. 불에 구워져 붉은 바탕흙 빛깔에 가사는 더욱 붉게, 살갗은 짙은 잿빛의 기와흙 빛깔로 처리했으므로 매우 강렬한 인상을 준다. 얼굴의 표정은 평온하나 이마, 눈매, 콧날, 단정한 입매, 턱이 빚어내는 분위기는 처진 어깨 때문에 더욱 길어보이는 목으로 해서 엄숙함과 진리 탐구자로서의 느낌을 물씬 준다.
다른 인물상을 만들면서도 그는 거의 하나 같이 어깨를 강조하지 않았는데, 여기서도 어깨는 처져있다. 어깨를 누그러뜨려 겸허해 보이도록 한 것일까? 그러나 곧추선 긴 목 위에 보이는 머리는 약간 치켜든 턱과 눈길의 방향이 주는 느낌 때문에 패기와 오만함이 느껴진다.
인간 정신의 고결함을 추구한 열정적인 삶과 대조되는 비참한 말로. 그가 온몸과 혼을 기울여 빚어낸 작품을 앞에 두고 거듭해야 할 물음은 한 두 가지가 아니다. 그의 작품 세계는 해방 전후부터 모색했을 민족정체성을 탐구하는 도정에서 여러 작풍으로 빚어진 말을 비롯한 동물상, 허영과 욕정이 사라진 고결한 여인상, 수많은 자기 모습(약 20점의 자소상, 자각상이 있다)으로 대별된다. 지금으로서는 과천의 현대 미술관, 용인의 호암 미술관과 멀리 일본 도쿄(동경)의 근대 미술관에서 각각 1, 2점씩을, 고려대학교 박물관에서 모두 3점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최석태 미술평론가>최석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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